선출권력 정당성, 반대자 수용해야 견고
지지자 넘어서는 보편적 이익 추구하고
‘해서는 안 될 일’에 자기 절제해야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형성의 근간은 국민의 투표와 선택에 있음은 자명하다. 대통령이 국회와 더불어 선출 권력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지만, 현행 헌법의 특성과 우리 정치문화의 속성을 고려해보면 대통령이 국정 운영과 국민 생활의 향배에 더 긴밀하게 직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치유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야 불문하고 정치권에서 오랫동안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선출 권력의 건강한 행사가 현행 헌법의 틀 속에서라도 조속히 정착되어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없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되는 순간 선출 권력의 뿌리가 내려진다. 과반수를 넘지 않는 당선자가 배출되었더라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승복은 원만한 국정 운영을 위한 필수적 사전 조건이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당선되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잘하길 바라고 여의치 않더라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믿고 기다려보자”라는 심리적 순응은 민주시민의 기본 양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국민 다수가 부여한 선출 권력의 정당성은 필요조건에 불과할 뿐, 국정운영 시 발생되는 갈등과 대립을 ‘선출 권력의 정당성’이라는 명분으로 손쉽게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정 책임자들은 ‘선출 권력이 만능’이라는 경직적 사고에서 벗어나 국민의 보편적 기대에 충족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국민적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가시화될 때 선출 권력의 실질적 정당성은 견고해진다. 그러나 선출 권력이 국가공동체의 가치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이 반대자는 물론 기존의 지지자 계층에까지 뿌리내리게 하는 일은 가혹하리만큼 어려운 과업이다.
이 과정에서 선출 권력이 어떤 자세와 지향성을 취하느냐가 관건이다. 선출 권력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변하는 행태나 국정의 기본 방향과 정책의 선택에 지지 정당의 당파적 목적을 잠입시키는 의도는 국정 운영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반대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비판을 경청하는 열린 리더십의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당선을 가능하게 했던 지지그룹을 위한 정책 목표와 부분적 이익을 상당수 반대 국민의 입장과 조화시킴으로써, 다양한 목표와 이익을 보편이익으로 전환ㆍ격상시키려는 고뇌에 찬 노력이 긴요하다.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상호 존중의 정치 문화와 타협ㆍ포용 노력이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지지자 그룹의 입장에 경도되지 않고 반대자의 관심과 입장을 함께 고려하는 균형적 자세야말로 선출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정치적 리더십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한을 행사한다. 형식적ㆍ선언적 위임이 아니고 항상 국민의 보편적 이익에 부합되어야 하는 제약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엄중한 위임’이어야 한다. 위임받은 권한은 ‘해서는 안 될 일’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 대한 부단한 자기 절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해야 할 일’ 역시 국회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하고, 중립적 관료제의 판단을 중시하는 성숙된 정책 결정 기조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대표적 권한 중의 하나인 인사권만 해도 형식적 요건을 넘어서 다수의 공감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인사의 적재적소 배치’라는 평범한 조건이 권한 행사과정에 투영되어야 한다.
미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 중 아침 일찍 반대 입장을 쏟아내는 민주당 지지 언론사 편집인들에게 “비판 기사를 잘 읽었다. 국정 방향 정립에 유익했다. 앞으로 많은 조언을 기대한다”고 전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전화 받는 언론인들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대통령의 진지한 태도에 감격했다는 이야기를 최고지도자의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로 평가절하할 수 없다. 반대자에 대한 그와 같은 여유 있는 경청은 치우치기 쉬운 국정의 흐름을 정상 궤도로 유도하는 구심력이 될 수 있다.
오연천 울산대 총장ㆍ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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