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할리우드 황금기 대표 배우 커크 더글러스 104세로 별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할리우드 황금기 대표 배우 커크 더글러스 104세로 별세

입력
2020.02.06 16:11
수정
2020.02.06 19:13
27면
0 0
1962년 당시 커크 더글러스. AP 연합뉴스
1962년 당시 커크 더글러스. AP 연합뉴스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4세.

고인의 장남이자 배우인 마이클 더글러스(76)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나와 우리 형제들은 커크 더글러스가 오늘 우리 곁을 떠나갔다고 발표하게 돼 매우 슬프다”고 밝혔다.

고인은 1916년 미국 뉴욕 러시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7남매 중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래 1950,60년대 할리우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턱 가운데 부분이 들어간 독특한 외모로 주로 강인한 역할을 맡았다. ‘OK목장의 결투’(1958), ‘스파타커스’(1960) 등 90여편에 출연해 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았다.

1958년 영화 홍보담당 앤 바이든과 결혼한 후 해로했지만, 스타 배우로서 여배우와 염문도 많았다. 1988년 낸 자서전에서 조앤 크로포드, 마를렌 디트리히, 리타 헤이워스와 사랑을 나눴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고인은 자수성가형 배우였다. 배우 이전엔 40여개 직업을 전전하다가 뉴욕 성로렌스대에 연기에 입문했다. 본명이 ‘이서 대니엘로비치’였던 고인은 뉴욕 드라마 아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커크 더글러스’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꿨다. 고인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난 나만의 길을 개척했고, 어느 누구도 나의 상사가 될 수 없다. 난 괴짜다”라 하기도 했다.

사회참여도 적극적이었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타파에 앞장선 배우로도 유명하다. 고인은 자신이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 블랙리스트 타파 운동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한다. 홈리스 여성과 공립학교를 위한 자선 활동도 열심히 했다. 2015년 8,000만 달러 기부 계획을 발표했다.

커크 더글러스가 2016년 장남인 유명 배우 마이클(위 왼쪽 두 번째)과 며느리 캐서린 제타존스(위 왼쪽 세 번째), 손자 손녀와 함께하고 있다. 더글러스 오른쪽은 부인 앤이다. AP 연합뉴스
커크 더글러스가 2016년 장남인 유명 배우 마이클(위 왼쪽 두 번째)과 며느리 캐서린 제타존스(위 왼쪽 세 번째), 손자 손녀와 함께하고 있다. 더글러스 오른쪽은 부인 앤이다. AP 연합뉴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주 만에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 나타나 평생공로상을 받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각종 장애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2014년 한 인터뷰에서 “내 인생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권총을 입에 넣었는데, 총구가 이를 쳐 크게 아팠고, 치통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막았다”고 술회했다.

자식들은 배우가 되지 않길 바랐으나 장남 마이클은 유명 배우가 됐고, 2004년 숨진 막내아들 에릭도 배우로 활동했다. 마이클의 부인 또한 유명 배우인 캐서린 제타존스다.

고인의 죽음이 알려지자 할리우드는 슬픔에 빠졌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의 생애 후반부 45년 가운데 일부를 함께해 영광이었다”며 “그의 편지, 조언, 지혜, 용기 등이 그리울 것”이라고 썼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