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캑스(1989.11.20~ 2019.12.16)
마텔(Mattel)사의 패션 인형 ‘바비(Barbie, 본명 Barbara Millicent Roberts)’가 지난해 3월 환갑(還甲)을 맞이했다. 흑백 줄무늬 수영복 차림으로 1959년 3월 뉴욕 장난감박람회(Toy Fair)를 통해 등장한 8등신 금발의 바비는 그 자체 여성적 미와 패션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며, 지금도 주름살 하나 없는 모습으로 한 해 평균 5,800만 개씩 세계 150여 개 국에서 팔리고 있다.
바비도 유행 따라, 변천하는 미의 규범에 발맞춰 나름 분주히 변신해왔다. 69년 첫 흑인 ‘크리스티(Christie)’가 바비 친구로 잠깐 등장했고, 10년 뒤인 79년 공식적인 흑인과 히스패닉 바비가 출시됐다. 81년엔 동양인 외모의 ‘오리엔탈 바비’도 ‘Dolls of the World’ 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다. 페미니즘 운동의 60년대를 거치며 바비의 직업도 수영복 모델에서 교사, 스튜어디스, 우주비행사, 엔지니어 등으로 옷과 액세서리를 통해 다양해졌고, 1992년에는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며 ‘시대를 선도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63년 뉴욕타임스는 마텔사의 상술 즉 “어린 여성들로 하여금 인형을 제 아이가 아니라 자기의 분신으로 여기게 하려는 혁명적 발상”의 폭발적 시장성에 주목하는 기사를 썼다. 마텔사의 바비 홈페이지에는 “1959년 이래 바비는 소녀들에게 뭐든 될 수 있다는 꿈을 주는 존재였다. 공주든 대통령이든, 우주비행사든, 동물학자든, 바비가 깰 수 없는 ‘플라스틱 천장(plastic ceiling)’은 없었다. 오늘날 바비는 200개가 넘는 분야의 직업인으로 활약하며, 모든 소녀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쓰여 있다.
바비의 저항이 가장 완강했던 건 치장이 아니라 몸 자체였다. 가슴은 점점 커졌고, 허리는 가늘어졌고, 사지는 더 길어졌고, 금발은 더 풍성해져 갔다. 소비자들도 바비를 편들었다. 2세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미인대회 반대 시위를 벌이며 ‘자기 몸의 긍정(Body Positivity)’ 캠페인을 벌이던 1968년 한 해에만 마텔사는 무려 5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폴란드 유대인 이민자의 딸로 바비를 창조한 마텔사의 루스 핸들러(Ruth Handler1916~2002)는 1977년 인터뷰에서 “모든 소녀는 미래의 꿈을 투사할 수 있는 인형을 원한다. 그들이 16, 17세가 돼 밋밋한 가슴을 가진 자신을 상정하며 롤플레잉하라는 건 좀 어리석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바비에게 아름다운 가슴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 마텔사가 2016년 글래머와 단신ㆍ장신 등 세 유형(Curvy, Petite Tall)의 체형과 7가지 피부 톤, 다양한 눈동자 및 머리카락 색을 지닌 ‘패셔니스타 Fashionistas’ 라인을 출시하며 본격적인 ‘진화의 시작(#thedollevolve)’을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해 새 컬렉션에 브레이즈(braidedㆍ가늘게 여러 가닥으로 땋기) 헤어스타일에 작은 가슴과 튼실한 허리를 지닌 바비와 함께 휠체어에 앉은 바비와 의족의 바비를 포함시켰다. 원년의 바비 신화를 이룩한 ‘혁명적 발상’의 혁명적 전환이 실로 60년 만에 시작된 거였다. 물론 이면에는 바비의 세월보다 오래된 인종-젠더-장애차별(ablism)에 대한 힘겨운 투쟁이 있었다. 11.5인치 키의 바비의 몸은 보이지 않는 상처와 흉터의 전장이었다.
마마 캑스(Mama Cax)는 그 전장에 가장 늦게 뛰어든 이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많은 전선에서 찬란한 진전을 이룬 흑인 여성 장애인 패션모델 겸 반 차별 운동가였다. 저마다의 몸에 대한 긍정과 사랑과 신뢰를 위해, 억압 없는 자유를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해, 누구보다 당당히 걸었던 마마 캑스가 12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30세.
캑스(본명 캑스미 브루투스, Cacsmy Brutus)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10세 무렵까지 부모의 고향 아이티와 캐나다 몬트리올 등지서 성장했다. 대표적인 악성 뼈종양인 골육종 진단을 받은 건 14세 무렵이었다. 암세포는 폐로 전이된 상태였지만 그는 항암치료를 견뎌냈다. 2년 뒤 의료진은 그에게, 살려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거나 고관절 일부를 교체하는 치환수술을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수술 후 인공고관절 거부반응이 시작됐다.(allure.com) 16세의 그는 오른쪽 다리와 고관절 일부를 잃었다. 수술 후 약 2주 동안 허리 아래론 쳐다볼 수도 없었다고, 그런 ‘모종의 혐오감(sort of disgust)’은 대학 초년 시절까지 지속됐다고 그는 말했다. (nyt) “또래들보다 다리가 길어 놀림 받고, 2차 성징이 더뎌 가슴 없다고 조롱 당하던” 그는 더 끔찍한 시선의 폭력 앞에 한 다리로 서야 했다. 2017년 에세이에 그는 “최대한 진짜 다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내 피부색에 맞춘 발포플라스틱 의족을 쓰고(…) 롱드레스만 입었다”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눈치를 살피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썼다.(glamour.com) 그는 뉴욕과 프랑스, 튀니지, 이탈리아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땄다. 그의 꿈은 유엔 단체 등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거였다.
유년시절 역사와 지리학을 가장 좋아해서 “언젠가는 피사의 사탑도 보고 나이지리아 라고스 시장도 구경하고 마추픽추도 트레킹하고 싶”었다고 한다. 언론 매체로선 최초로 2015년 6월 캑스를 소개한 여행 웹진 ‘afar’는 그를 “파트타임 여행자 겸 풀타임 몽상가 블로거”라 썼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장애인 여성으로서 두렵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18세 무렵부터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 졸업 직후 태국행 편도 항공권을 끊어 약 6개월 가량 현지를 머문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불확실성에 적응하게 되면 무한한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는 걸 일깨워준 것도 여행이었다. 인스타그램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였다. 그 무렵의 그는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성적인 조롱 같은 비열한 반응들에도 당당히 맞섰다. 호의와 존경과 감사를 전하는 이들이 그에겐 훨씬 많았다. 한 달 뒤 인터뷰에서는 “비로소 스스로를 평가하는 자아로부터 벗어나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바라보는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내 상처는 내가 승리한 전투의 흔적이었고, 내 의족은 보다시피 이렇게 엄청나게 매력적인 ‘영계 사이보그(cyborg chick)’로 만들어줬다”고 농담했다.
더 전, 그는 사진 찍는 친구들과 ‘팜잠(Fanm Djanm, 아이티 크레올어로 ‘강한 여성’이란 뜻)’이란 브랜드의 헤어스카프 인스타그램 모델을 했고, 의족을 패션 아이템으로 처음 출시한 ‘Alleles’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변화의 이면에는 2010년 무렵부터 SNS를 통해 재점화한 이른바 3세대 ‘Body Positivity’ 캠페인과 페미니스트 오버사이즈 모델 테스 홀리데이 등의 활동이 있었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예전의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자기 몸에 자신이 있으면 덜 꾸민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경우는 정반대였다. 나는 화장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과감한 색조 화장도 시도하곤 했는데 그건 흑인으로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패션과 미적 기준의 다양성을 가시화하는 인스타그램의 2016년 5월 온라인 캠페인 ‘#RunwayForAll’의 첫 주자가 마마 캑스였다. 그는 “10대 누구든 잡지를 펼치거나 패션쇼를 보면 자신(의 몸)이 대변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며 흑인 부재, 장애인 부재의 패션 세계를 비판했다. 그리고 “배제는 가장 끔찍한 장벽이다. 나는 아름다움이란 게 ‘0사이즈’ 옷을 입지 않는 사람에게도, 두 다리로 걷지 않는 이에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썼다.
그의 오프라인 모델 데뷔 무대는 2016년 9월 15일, 오바마 행정부의 미 백악관 ‘모두를 위한 디자인 Designing for All’ 패션쇼였다.(mamacax.com) 그 무렵 뉴욕 시장 인턴 직원으로 일하던 캑스는 장애인 및 의수ㆍ의족을 포함한 장애 보조장비의 디자인 포용성(inclusivism)을 부각하기 위한 그 행사에 모델로 초대받았다. 석사 학위를 마친 2017년 진로를 두고 생각이 많던 그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화장품 브랜드 ‘웻앤와일드(Wet n Wild)’의 화장품 모델이 돼 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그는 유명 모델 에이전시인 ‘JAG모델스’와 계약을 맺고 직업 모델이 됐다. “미의 세계에 내가 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초현실적이었다”고, “그건 어떤 장애물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베카(Becca) 코스메틱스, 올레이, 토미 힐피거, 세포라, ASOS 등 미용ㆍ패션 모델로 분주하게 활약했다. 그에겐 그게 일이자 캠페인이었다.
그는 2018년 세계 정상급 모델들만 선다는 뉴욕패션위크 무대에 수영복 브랜드 크로맷(Chromat) 사의 디자이너 베카 맥카렌(Becca McCharen)의 모델로 런웨이를 걸었고, 그 해 9월 잡지 ‘틴 보그(Teen Vogue)’의 표지에 질리언 메르카도(Jillian Mercado), 첼시 베르너(Chelsea Werner)와 함께 ‘패션의 새 얼굴들’이란 타이틀로 소개됐다. 지난 해 9월엔 가수 겸 사업가 리한나(Rihanna)의 화장품 및 속옷 브랜드 ‘Fenty Beauty’의 쇼무대에도 섰다.
그는 화장 등 쇼를 준비해야 하는데 현장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애를 먹는 등 다른 모델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들이 여전히 많지만, “가장 힘든 건 우리 사회가 완벽하다고 인정할 만한 육체를 지닌 100여 명의 모델들과 한 방에 머무는 시간 자체”라고, “나는 내가 여기 있는 건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환기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2018년 10월 11일 유니세프의 ‘소녀의 날(Day of the Girl Child)’ 행사 연단에 선 그는 자신이 화장대 앞에 처음 앉던 순간을 회상하듯 “Body Positivity는 외형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건 자신의 몸을 사랑하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는 깨달음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다리를 잃기 전 농구를 즐겼고, 학급에서 가장 빠른 러너이기도 했다는 그는 장애인이 된 뒤로도 수영을 익혔고, 휠체어 농구와 서핑, 암벽등반을 배웠다. 지난 해 11월 3일에는 뉴욕마라톤 휠체어 부문에도 출전해 완주, 자신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해치웠다. 리스트의 항목들은 더 많았을 테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캑스는 지난 해 말 영국 출장 중 폐색전 증상으로 런던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12월 16일 숨졌다. 유족은 캑스의 인스타그램에 “암 생존자인 캑스는 여러 생의 시련들을 극복하는 데 익숙한 삶을 살았다. 마지막 나날 동안에도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용기와 열정으로 삶에 임했다”고 밝혔다.
숨지기 한 달여 전 인스타그램에 그는 “나는 ‘롤모델이 누구냐’란 질문이 무척 싫다. 내겐 롤모델이 없었고, 스스로 나의 롤모델이 돼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역량을 쏟아 다른 이들의 삶을 고양시키는 데 힘쓰는 강하고 사나운(strong and fierce) 이들을 존경한다”고 썼다. 그가 말한 사나움은 밀쳐내는 사나움이 아니라 보듬는 의지를 지키려는 사나움이었다. 그는 사납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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