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실질적 감독 데뷔작인 ‘레이디버드’로 주가가 한창 치솟던 무렵. 그레타 거윅(37)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2018년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코미디ㆍ뮤지컬 영화 부문 작품상을 받은 직후였다. 수상자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미투’ 논란에 휩싸여 있던 우디 앨런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이다.
2012년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에 출연했던 그는 수상과 무관한 돌발 질문에 바로 답하진 않았지만 곧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의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리우드 대표 거장 앨런과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앨런을 감싸고 돌던 분위기에서 나온,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레이디버드’ 이후 내놓은 거윅의 다음 작품이 ‘작은 아씨들’(한국 12일 개봉)이라는 것, 동시에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울 정도의 극찬을 얻어내고 있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두고 “아마도 지금까지 미국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 최고작일 것”이라 평했다.

거윅에게 쏟아지는 극찬은 감독으로서의 탁월한, 현대적 재해석 때문이다. 사실 ‘작은 아씨들’은 소재로서는 좀 식상한 편이다. 1868, 1869년 루이자 메이 올컷이 두 권으로 나눠 출간한 이래 고전 중 고전으로 꼽혔던 소설이다. 또 그 때문에 1917년 무성영화로 처음 제작된 이후 영화, 드라마로 여러 차례 극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거윅 감독은 원작의 뼈대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재조립했다. 우선 시간 흐름에 따라 쓰여진 원작의 스토리를 분해, 재구성했다. 어른이 돼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현재(2권)와 7년 전 고향 집에 함께 살던 과거(1권)를 쉴 새 없이 오가도록 했다. 소설이 소녀 시절의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시나브로 사라져가는 느낌이라면, 영화는 꿈 많던 과거를 계속 떠올리게 한다.
거윅은 원작의 핵심을 ‘여성, 예술, 돈’으로 봤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출판사 편집자와 계약하는 장면으로 해둔 이유다. 이는 원작자 올컷의 고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 올컷은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 조(시얼샤 로넌)에 스스로를 투영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자신과 달리 조가 결혼하도록 했다. 1권 출간 뒤 독자와 출판사가 집요하게 요구한 결과였다.
19세기 시공간에서 올컷이 시대와 타협을 택했다면, 거윅 감독은 이 타협으로 지워진 이야기들을 21세기적 관점으로 되살려낸다. 가령 영화에서 조는 “여자에게도 마음과 영혼이 있어. 야망도 있고 재능도 아름다움도 있어. 여자에게 필요한 게 사랑뿐이라고 말하는 건 지긋지긋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소설에 없다. 올컷의 다른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막내 에이미(플로렌스 퓨)를 영화에서 한껏 부각시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덕에 영화는 19세기 미국을 다루고 있음에도 마치 현대극처럼 생기발랄하고 입체적이다. 영화로 각색된 ‘작은 아씨들’ 가운데 가장 호평받았던, 위노나 라이더가 출연했던 1994년 영화를 지극히 평면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거윅은 직접 연출한 ‘레이디버드’, 작가 겸 배우로 참여한 ‘프란시스 하’ 등 기존 작품에서 보여준 편집과 대사, 연기의 리듬감, 진취적 여성에 대한 응원, 개성 넘치는 캐릭터 구성, 각 인물에 대한 고른 애정을 ‘작은 아씨들’에서도 변함 없이 보여준다.

“기억도 못할 만큼 어렸을 때부터 ‘작은 아씨들’을 읽었다”는 거윅 감독은 30대에 들어 15년 만에 다시 이 책을 다시 접하며 “소설이 현재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레이디버드’로 재능을 인정 받기도 전, 아무도 거윅을 재능있는 연출자로 보지 않았던 그 때 거윅은 ‘작은 아씨들’의 영화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영화사를 찾아갔다. “이 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30년을 기다렸다”고.
어릴 적부터 극작가를 꿈꿨던 그는, 자신의 꿈이 ‘작은 아씨들’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올컷, 조와 나는 닮았다. 나 역시 결혼하지 않았고, 올컷이 소설을 발표했을 때 36살이었듯, 나도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36살이었다. 늘 조를 좋아했다. 조는 늘 나와 함께 있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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