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험지 출마’ 성공 여부는 ‘진정성’에 달려있다. 정략적 차원이 아닌 명분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선언하며 직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종로가 아닌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 예다. 비록 낙선했지만 그때 얻은 ‘바보 노무현’ 이미지는 2년 뒤 대선 가도에 큰 자산이 됐다.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지내다 2012년 고향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지만 20대 총선에 당선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과 2014년 전남 순천 보궐선거에 당선돼 최초의 호남 출신 새누리당 대표로 기록된 무소속 이정현 의원도 지역주의 극복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등 떠밀려 험지에 출마한 경우는 대개 결과가 좋지 않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공개적 험지 출마 요구를 받아들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서울 종로에, 안대희 전 대법관이 서울 마포갑에 나섰으나 모두 낙선했다. 안 전 대법관은 고향 부산에서 출마 준비를 하다 뒤늦게 지역구를 옮겼다가 쓴맛을 봤다. 한때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그는 이때의 실패로 정치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정작 당시 최고위원 가운데는 지역구를 양보하고 험지에 출마한 이는 아무도 없어 ‘험지 전략 실패 교과서’로 회자된다.
▦ 4월의 21대 총선을 앞두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험지 출마’ 늪에 빠진 형국이다. 지난달 “수도권 험지에 출마하겠다”고 한 뒤 한 달째 출마 지역구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 출마해 민주당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맞대결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사실상 접은 분위기다. 자칫 큰 표차로 패할 경우 대선을 노리는 황 대표에겐 치명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다.
▦ 황 대표가 서울 마포갑ㆍ용산 등을 놓고 저울질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게 험지냐”는 반론에 부딪힐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예 불출마 상태에서 총선 전체를 지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제는 그럴 경우 텃밭인 영남권 출마를 고집하는 중진 의원들에 대한 ‘험지 출마’ 요구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공천 단두대’에 선 TK(대구ㆍ경북) 의원들을 물갈이할 명분도 없어진다. 진정성도, 의지도 부족한 황 대표의 ‘험지 코스프레’가 한국당에 가장 큰 악재가 되고 있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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