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팬덤을 싫어한다. 맹종과 일방성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의미에서 ‘진중권’ 팬이다. 그가 팬덤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 팬덤이 추종하는 대상은 현 집권 세력이다. 자칭 팬칭 ‘촛불 정권’ 말이다. 아직 도처에 악(惡)이고, 혁명은 미완이다. 성전(聖戰)은 지속된다.
진중권의 같은 편(진보) 겨냥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아직도 그가 동경하는 노무현 정부 당시 맹목적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여권과 대립하며 ‘황우석 신화’ 깨기의 선봉에 섰고, 이명박 정부 때는 음모론을 비판하며 ‘나는 꼼수다’(나꼼수) 출연진과 한판 붙었다. 그리고 지금 ‘진(陳)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그를 추동하는 주 연료는 배신감인 듯하다. 오로지 권력을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만 지금 정권한테 남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정치철학자 김영민에 따르면, ‘정의의 사도’를 자임했던 전직 운동권의 타락은 군부 정권의 타락과 다르다. 위선이 판명된다면 정의의 존재가 부정되고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진보 서사가 붕괴한다.
애초 그는 ‘촛불 정권’이라는 환상을 권력이 유지하기를 바랐고, 거기에 협조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본보에 매주 연재하는 글에서다. 그러나 후안무치가 도를 넘었다고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당사자를 도려내 부패를 감추려 한 역대 정권들과 달리 현 정권은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고 아예 그들에게 맞춰 세계를 날조하려 한다는 게 그의 의심이다.
진중권이 경계하는 건 맹신이다. 1일 페이스북에 “친문 세력이 지지자들로부터 맹목적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정치를 사이비 종교로 만들어버렸다”고 썼다. ‘가능(가짜) 세계’가 현실이 되려면 모두가 담합해야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대중도 공모자라는 얘기다. “대중은 선동가들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준다. 기만이 아니라 새 현실을 창조하는 실천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진실의 실종’이 진중권만의 별난 각성은 아니다. 사회학자 김호기는 본보 기고에서 “사실과 주장, 정보와 오락, 진실과 허위가 혼재되고 결합돼 있는 게 오늘날 우리 공론장의 현주소”라며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개념을 차용했다. 진중권의 본보 연재 코너명은 ‘트루스 오딧세이’다. 진실을 찾아 떠나는 탈(脫)진실 시대 여행이라는 뜻이다.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건 그의 화법과 태도다. “그의 칼춤이 아름답다”(작가 고종석)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다이아몬드를 훔쳐 달아나다 열린 맨홀에 빠지는 바람에 감옥에 가서는 맨홀 탓만 하는 도둑을 ‘조국 부부’에 빗대는 풍자나 전 청와대 대변인 김의겸과 여당 대표 이해찬의 가상 대화를 신파극으로 각색하는 해학은 일품이다.
하지만 조롱과 독설이 지나쳐 재기를 바래게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전 대통령 비서실장인 임종석에게 “분위기에 취해 패가망신하지 말라”고 경고한 게 대표적이다. 대중을 경멸하는 듯한 ‘잘난 척’이나 일도양단 단정도 거부감을 부추긴다. 관심 끌려(관종) 분란 일으킨다(어그로)는 빈축이나 심판연(然)하지만 선수일 뿐이니 주제 파악하라는 반발이 돌아온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강한 척’은 위선적인 거대 기득권 진영과 맞서기 위해 불가피한, 어느 정도 전략적인 위악인지도 모른다. 위악은 염결의 소산이다. 욕망만 좇으며 대의를 위하는 척하는 몰염치를 못 참는 것이다. 문재인과 노무현을 짐짓 분리하는 게 얼마간 ‘대깨문’(대가리 깨져도 문재인)과의 싸움에 집중하려는 취지라면 영리한 선택이지 싶다.
진중권이 전문가가 아닐 수 있다. 틀릴 수 있고, 방법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를 지지하는 건 그가 매력적인 인격체여서가 아니라 특정 가치를 체현하는 화신에 가깝기 때문이다. 의리보다 정의,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이념 실현에 복무한다는 게 그의 일관성이다. 그를 응원한다. 이기는 싸움을 하기를.
권경성 문화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