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가 너무 드센 게 문제야. 그러니 남자가 없지. 성질 안 죽이면 평생 시집 못 가.”
직장인 A(36)씨는 설 연휴 뒤 친구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신년 운세를 보러 갔다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했다. 입에 발린 소리만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젠 가족들도 건드리지 않는 결혼 문제로 들들 볶일 줄은 몰랐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과 꿈이라 커리어 관리에 대해 물어보려 갔다가 돈 버리고 기분만 상했네요.”
여성들에게 A씨 사례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여자가 사주 보러 가면 듣게 되는 얘기가 있다. 남자 기를 죽인다거나, 남자 덕에 편하게 살겠다거나, 자식 복이 있겠다던가. 분명 내 사주를 보러 간 건데 해주는 얘기라곤 남편, 자식 얘기다. 그게 여자 인생의 전부라는 듯.
“세상은 이만큼 바뀌었는데, 사주풀이는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게 문제에요. 그런 말에 연연해 여성들의 인생이 꺾이거나 쓰러지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납니다.”
5년째 사주 상담가로 일하고 있는 릴리스씨가 ‘21세기 현대 여성을 위한 사주 풀이’를 주창한 이유다. “남자 팔자, 여자 팔자 따로 있는 게 아니다”며 ‘이분법적 사주풀이 박멸’을 내세운 릴리스에게 2030 여성들이 환호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 아예 ‘페미니즘 명리학’을 표방한 ‘내 팔자가 세다고요?’라는 책까지 냈다.
사주 풀이는 왜 남성중심적일까.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성차별적이기 때문이죠.” 릴리스가 보기에 명리학은 통계학이다. 과거 나와 같은 사주를 가졌던 사람들의 인생기록을 한데 모아 분석한 일종의 빅데이터다. “가부장제 역사가 1만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 차별적 데이터가 압도적으로 많이 입력됐다”고 봐야 한다. 똑같은 사주를 두고도 남녀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 건 그 때문이다.
대표적 이중잣대가 관운(官運)이다. 관운은 사회적 명성을 뜻한다. 남성 사주에서는 좋은 직업과 사회적 성공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성 사주에 관운이 나오면 오직 ‘남자’로만 해석한다. 남자에게 관운이 있으면 성공하겠다고 덕담을 건네지만, 여자에게 관운이 있으면 “남편 복이 있겠다”고만 한다. 심지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대성할 팔잔데”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과거에야 여성에겐 남성에게 종속돼 살아가는 옵션 이외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어요. 그러니 여자 사주풀이의 기준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죠. 노예의 운명이 주인에게 달린 것처럼요.” 그렇기에 현대 사회의 사주풀이는 예전과 절대 똑 같은 수 없고, 똑 같아서도 안 된다. 릴리스가 ‘21세기 현대여성을 위한 명리학’을 역설하는 까닭이다.
“남자는 무조건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이란 것도 잘못된 거예요. 남자 중에도 음기가 강하고, 여자 중에도 양기가 센 사람도 있죠. 기질과 성향의 차이일 뿐, 어떤 게 좋다 나쁘다는 건 없어요. 옛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폄하할 권리를 누가 줬나요.”
릴리스는 사주 상담가, 역술인들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명리학을 업으로 삼은 이들은 누구보다 시류에 민감한 ‘얼리 어답터’가 돼야 해요. 예언가처럼 으스대며 윽박지르는 ‘도사놀이’는 그만해야죠.”
백 번 맞는 말이지만, 업계에서 릴리스는 여전히 소수자다. ‘너만 잘났냐’는 핀잔도 듣는다. 그래서인지 사진 촬영이나 신상 공개를 조심스러워했다. 하지만 ‘페미니즘 사주풀이’, 아니 ‘21세기 현대 여성을 위한 사주풀이’를 멈출 생각은 없다.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딱 하나에요.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함부로 깎아 내리는, 칼날 같은 혀에 휘둘리지 말라는 겁니다. 팔자가 세다고 그러면 그냥 내가 상여자구나, 생각하시면 돼요. 진취적이고 강한 여성 말이에요.”
“팔자가 아무리 진상을 떨어봐라. 내가 주저 앉나.” 드라마 ‘동백꽃필무렵’의 여주인공 동백이의 대사다. 릴리스가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전하고픈 말이기도 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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