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들불(bushfire)은, 호주국립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수천 년 호주 원주민과 동식물에겐 친숙한 자연의 일부였다.
혹서기 건조 열풍과 마른 초원은 자연 발화의 좋은 여건을 조성했고, 그렇게 초목이 탄 자리에는 여린 새 풀들이 자라 캥거루 등 야생동물을 유인했고, 그 길목을 원주민 사냥꾼들이 지켜 가족을 먹이곤 했다. 식물들도 그 환경에 적응해 들불을 견뎌 싹을 틔우는 종들이 생겨났고, 원주민들이 스스로 불을 놓아 ‘뗄감’의 규모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들불의 난폭함을 길들이곤 했다.
18세기 말 유럽의 백인 정착민들이 들어와 들불을 통제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들불은 걷잡을 수 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백인 총독 정부는 1797년 들불을 겪은 이듬해인 1798년 원주민들의 들불 발화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더불어 도시화도 급격히 진행됐다. 도시와 관목지대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자연 발화가 난폭해질수록, 문명의 화재 통제 시스템은 더 삼엄해졌다.
지난해 9월 시작된 들불(산불) 전까지, 호주 역사상 최악의 들불 재난으로 꼽히는 화재가 꼭 10년 전인 2009년 2월 7일 남서부 빅토리아주 킹레이크(Kinglake)에서 시작됐다. 그 화재는 3월 중순까지 중남부 여러 지역으로 번지며 173명의 목숨을 앗고 414명의 육신을 상하게 했다. 450만ha의 산림과 도시가 불탔고, 2,000여채의 가옥을 포함, 3,500여개 건물이 사라졌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식물들이 희생됐다.
화재 직전 빅토리아주 더위는 역대 최악이었다. 멜버른 기온은 1월 31일 섭씨 45.1도였고, 화재 당일엔 관측 사상 최고인 46.4도를 기록했다. 시속 100km를 넘나드는 건조 열풍으로 평균 습도는 2%에 육박했다. 당시 주지사의 경고처럼 호주 남서부 전역이 ‘부싯돌(tinder-dry)’같은 상황이었다. 송전선의 벗겨진 피복에서 발화한 불은 열풍을 타고 불가항력적으로 번졌다. 화재원인 조사와 전력회사를 상대로 한 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소송 등과 별개로, 호주 정부는 기존 들불 예방ㆍ방지 수칙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했고, 건축 규제도 강화했다.
동물만 4억8,000만마리를 희생시킨 이번 화재의 주원인은 물론 기후 파괴로 더 거칠어진 바람과 고온현상이다. 석탄 개발 등 당국의 안이한 대처도 원인 중 하나였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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