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경제적 이윤을 얻으려고 상품의 친환경적 특성을 가짜로 만들거나 부풀리는 행위를 1986년 미국의 환경학자 제이 웨스터벨드는 ‘그린워시’(Greenwash)라 명명했다. ‘녹색’과 ‘세척’의 합성어다. 가령 유해 화학 물질이 사용된 종이 재활용은 환경 친화적일 수 없다. 오히려 환경 파괴적이다.
이런 기만이 기업 차원에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부작용으로 기후 변화 등 전 지구적 환경 위기가 닥치자 2010년대 초반 국제기구들이 앞다퉈 제시한 대책이 ‘경제의 녹색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교란을 막기 위해 지배 계급이 고안해낸 거짓 대안이라고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는 폭로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다양한 자연에 하나의 가격을 부여할 때 기존 경제가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가 녹색 경제 전략의 근본 가정인데, 그들의 구호는 “탄소에 가격을 매겨라”다.
녹색 경제가 자본주의에 포섭적인 건 무엇보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자연을 가치화한다는 점에서다. “이산화탄소 흡수원과 생물 다양성 저수지로서의 산림 보전 같은 생태계 서비스에 대한 지불”이 “비자본주의적 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가치화”의 전형적 형태다.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 배출권 거래처럼 “사적 개인이나 기업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소비와 생산에 제약된 환경 피해를 상쇄의 형태로 방출할 수 있다면, 자연은 대체 가능하다는 확신이 공고해질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지적이다. 한곳에서의 배출을 다른 곳에서의 재조림(再造林)으로 보상한다는 발상은 착각일 테다. 자연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다.
때문에, 에너지 소비는 감소하는 대신 전가된다. “사회적 핵심 부문에서 환경과 에너지 위기는 필요한 인프라 투자로 인해 상당한 가치 창출 잠재력을 지니고 따라서 경제 위기 관리에도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그럴 경우 에너지 소비 수준의 언급할 만한 감축을 이루지 못한 채 그 사회적ㆍ생태학적 비용의 외부화가 다만 다른 분야로 옮겨갈 뿐이다. 요컨대 화석 자원과 이산화탄소 흡수원으로부터 대부분 남반구의 광상에서 채굴해 북반구의 재생 가능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구리와 희토류 같은 금속들로 옮겨간다.”
“녹색자본주의는 생태학적인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건 물론 불평등을 줄이거나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삶의 조건을 창출하지도 못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비용뿐 아니라 착취도 외부화한다는 것이다. 외부화 대상은 “중국과 아프리카 또는 다른 곳에서 비참한 조건 아래 수많은 녹색 기술에 필수불가결한 희토류나 그 밖의 원료를 채굴하는 노동자, 미국ㆍ유럽 시장에 바이오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건강과 생명을 거는 브라질 농장의 사탕수수 노동자, 땅 움켜쥐기(미개발지의 매입이나 임대)에 의해 내쫓기는 소농, 재조림 활동에 대해 불확실한 가치의 약속어음으로 보답 받고 식량 안보를 기후 보호를 위해 희생시키는 케냐의 여성” 등이다.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울리히 브란트ㆍ마르쿠스 비센 지음ㆍ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발행ㆍ280쪽ㆍ1만8,000원
저자들의 결론은 이렇다. “필요한 건 (녹색자본주의 같은) 위장환경주의의 위험을 반성하고 인종주의적이고 착취적이며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프로젝트에 대해 빨간 선을 긋는 것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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