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해 2월 취임한 이후 장외집회부터 삭발과 단식, 농성 등 대여 강경 투쟁에 올인해 왔다. 정치 실종 사태는 물론 ‘경제 파탄’에 대한 정부 여당의 책임을 부각시키는데 집중한 것인데, 그 때문에 정작 ‘황교안 표’ 정책과 비전은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 같은 황 대표의 투쟁 일변도식 행보는 그가 등장한 사진 속의 ‘백드롭(Backdrop)’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백드롭이란 보통 무대에 설치된 배경을 뜻하는데, 정치권에서는 정당 내 주요 회의나 기자회견 시 자신들의 주장이나 슬로건 등을 이 백드롭에 적어 인물 뒤편에 배치하는 일이 잦다. 백드롭의 효과는 음성이 표현되지 않는 보도사진이나 영상 클립 등에서 크다. 백드롭에 적힌 문구만으로도 주요 쟁점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확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슈의 흐름에 따라 쟁점 또한 변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경우 유통기한이 지난 백드롭은 자연스럽게 교체된다.
황 대표 취임 직후인 지난해 3월 7일만 하더라도 한국당 최고위원회장의 백드롭에는 ‘통합’과 ‘미래’가 등장했다. 그가 취임 일성으로 ‘당내 세력의 통합과 화합’을 외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4월 국회에서 벌어진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 이후 황 대표는 장외투쟁을 선택했다. 5월 2일 ‘민생투쟁 대장정’에 나서기 직전 청와대 앞에서 열린 한국당 최고위원회에서 ‘민생파탄’과 ‘친문독재’를 바로잡겠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내걸린 것이다. 당시 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 “민생은 국회에서 챙겨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민생투쟁 대장정을 마치고 난 6월 5일 한국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장에는 ‘국민의 절망을 희망을 만들겠다’는 다짐이 백드롭으로 걸렸다. 국민의 절망적인 상황을 대장정을 통해 확인한 만큼 한국당이 나서서 민생과 경제를 챙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정작 정치권의 절망적인 상황은 그 이후 더욱 증폭됐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한국당과 청와대 및 여당의 대결은 극한으로 치달았고, 공수처법과 선거법 개정안 등의 상정과 통과 과정에서 한국당은 여당뿐 아니라 다른 야당들과도 등을 돌리게 된다. 그 사이 한국당의 백드롭 메시지는 본격적인 투쟁 구호로 채워졌다.
21대 총선이 다가오면서 한국당의 백드롭에도 변화가 생겼다. 12월 30일 한국당은 최고위원회의장 백드롭을 통해 ‘심판’을 주장했다. 4개월여 남은 총선을 겨냥해 여당 심판론을 본격적으로 꺼내 든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함께 보낸 극한 대립의 한 해를 ‘역사와 국민이 흘린 피눈물’로 표현한 백드롭에 촛불까지 그려 넣었다.
한국당의 총선용 슬로건은 지난달 29일에도 등장했다. 이날 열린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의 백드롭은 ‘힘내라 한국경제 웃어라 대한민국 우리가 대한민국입니다’였다. ‘분노’ ‘독재’ ‘날치기’ 등 투쟁 구호로 가득하던 한국당 백드롭에 실로 오랜만에 경제 키워드가 내걸린 것이다.
백드롭의 ‘변신’은 황 대표 체재가 투쟁에만 치우쳐 있는 동안 당 지지율이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는 문제 의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 지지율은 황 대표 취임 초기 30%에 육박했으나 최근 20% 초반 대까지 빠졌다.
이번 총선이 황 대표의 리더십에 대한 시험대로 여겨지는 만큼 향후 한국당 대표실에 어떤 내용의 백드롭이 등장할지 주목된다.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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