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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과 감사함이 곧 혁명이다”… 너무 아름다워 처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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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과 감사함이 곧 혁명이다”… 너무 아름다워 처연한 이야기

입력
2020.01.31 04:30
수정
2020.01.31 08:5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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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킹이 그린 ‘하늘을 나는 순간’. 저자의 대학 연구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북아메리카 대륙 탄생 관련 원주민 설화인 하늘여인 강림 이야기가 소재다. 원주민에게 대지의 공동 창조자인 이 여인의 이야기는 책 곳곳에서 환기된다. 에이도스 제공
브루스 킹이 그린 ‘하늘을 나는 순간’. 저자의 대학 연구실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북아메리카 대륙 탄생 관련 원주민 설화인 하늘여인 강림 이야기가 소재다. 원주민에게 대지의 공동 창조자인 이 여인의 이야기는 책 곳곳에서 환기된다. 에이도스 제공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즉 인디언인 저자의 친구 월리 ‘곰’ 메시고드는 부족의 제의에서 불을 지키는 ‘불지기’다. 인디언 회합에서 성스러운 식물 향모(향기가 나는 풀)를 태우는데 회합 참가자가 많으면 향모가 바닥날 때도 있다. 그러나 월리가 돈 내고 향모를 사는 법은 없다. 물론 팔지도 않는다. 선물에 감사하려는 제의의 취지가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인디언은 소유권을 부정한다. 저자는 회상한다. “나는 세상을 선물 경제로 경험했다. ‘재화와 용역’은 돈 주고 사는 게 아니라 대지에서 선물로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향모를 거래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냥 얻고 그냥 줘야 한다.

인디언들의 종교사회적 회합인 ‘파우와우’. 1983년 사진이다. 이 제의에서 향모를 태우기도 한다. 에이도스 제공
인디언들의 종교사회적 회합인 ‘파우와우’. 1983년 사진이다. 이 제의에서 향모를 태우기도 한다. 에이도스 제공

공유에는 이유가 있다. “많이 나눌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게 인디언의 신념이다. 선물 경제가 추구하는 건 관계다. “선물의 본질은 관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선물 경제 바탕에 놓인 화폐는 호혜성이다. 서구적 사유에서는 사유지를 ‘권리’로 이해하지만, 선물 경제에서는 재산에 ‘책임’이 결부된다.” 공유 사회에서는 선물이 호혜성의 고리를 타고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모두가 안다.

권리 집착은 이기심과 탐욕과 착취를 부른다. 저자의 경고는 ‘윈디고’ 출몰이다. 윈디고는 먹으면 먹을수록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디언 설화 속 괴물이다. 자기 생존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우리 내면 심리를 저자는 윈디고에 빗댄다. “우리가 정작 갈망하는 건 ‘속함’(소속)인데도 우리를 속여 소유가 우리의 허기를 채워줄 거라 믿게 만드는 게 윈디고의 방식”이다.

“우리는 날조된 수요와 강박적 소비라는 윈디고 경제의 시대를 살아가는 듯하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시장체제는 부의 원천과 소비자 사이의 흐름을 가로막아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낸다. 곡물이 창고에서 썩어가는 동안 굶주린 사람들은 쌀값이 없어 죽어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기아에, 누군가는 과식 질병에 시달린다.”

향모. 향기가 나는 풀이다. 대지에서 가장 먼저 자란 식물로 여기는 향모를 인디언들은 땋아 선물로 주거나 바구니를 만들고, 제의를 하며 태운다. 에이도스 제공
향모. 향기가 나는 풀이다. 대지에서 가장 먼저 자란 식물로 여기는 향모를 인디언들은 땋아 선물로 주거나 바구니를 만들고, 제의를 하며 태운다. 에이도스 제공

“다국적 기업들이 낳은 새 품종의 윈디고는 지구 자원을 필요가 아니라 탐욕으로 게걸스레 집어삼킨다. 우리가 주어진 것만 취하고 선물에 보답했다면 대기 오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기후 변화는 갚지 않고 끊임없이 받기만 하는 경제 형태를 여지없이 무너뜨릴 것”이라는 게 저자 경고다.

‘선물 경제로 공동체 유대를 회복해야 한다.’ 아주 새로운 메시지는 아니다. ‘의례적’ 성격의 선물 교환이 전통 사회에 보편적이고, 증여는 필연적으로 답례를 전제로 한다고 통찰한 건 마르셀 모스다. 이를 계승해 마르셀 에나프가 “선물의 목적은 연대의 창조와 재생”이라며 선물 교환 없이 상품 거래만으로는 인간 공동체가 갖춰야 할 사회적 결속을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책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건 소설가 김탁환이 “지나치게 우아하다”고 평가한 스타일이다.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시(詩)처럼 연상(聯想)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설화와 현실이, 과거와 현재가, 기억과 물질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며 마음을 흔드는 노래와 이미지, 정신을 깨우는 잠언들이 이야기 속에 녹아 흐른다.

저자인 로빈 월 키머러.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생태학자다. 에이도스 제공
저자인 로빈 월 키머러.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생태학자다. 에이도스 제공

큰 이야기는 두 개다. 식물학에 천착하는 과학자의 이야기와 자신의 뿌리로 거슬러가는 인디언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교차는 과학과 토박이 지혜, 두 상반된 인식론의 융합으로 나아간다. 저자는 고백한다. “나는 관계를 보고, 세상을 연결하는 끈을 찾고, (가르는 게 아니라) 합치는 성향을 타고났다. 하지만 과학은 관찰 대상과 관찰자를 서로 엄격하게 분리했다.”

저자가 경계한 건 자만이다. 서구 전통에서는 인간이 꼭대기에 있고 식물은 밑바닥에 있지만, 그는 언제나 “식물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이 나무들이 소통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나무의 대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기 때문이다. 지식의 테두리 밖에 있는 건 명명되지 않는다. 가령 아름다움은 과학이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다.

향모를 땋지 않으면 전통의 지혜가 깃든 이야기들이 사라진다. “식물을 잃는 건 언어를 잃는 것만큼이나 문화에 위협적이다. 향모가 없으면 할머니들은 7월 들판에 손녀를 데려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지음ㆍ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발행ㆍ572쪽ㆍ2만5,000원

저자가 되살리고 싶은 건 감사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감사는 전복적이다. “감사를 표현하는 건 혁명적이다. 소비 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희소성 대신 풍요를 인정하는 건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창조해 번성하는 경제에 타격을 가한다.” 인디언 학교에서 하는 감사 연설이라는 게 있다. 물고기님, 약초님, 나무님, 바람님, 해님, 달님, 별님, 어머니 대지님에게 오전 일과 전 학생들이 모여 인사와 감사를 보내는 것이다.

전염병 창궐 조짐에 오지 마라, 저리 가라, 혐오가 세상을 쩍쩍 갈라놓는 요즘, 호혜라니, 감사라니. 몽상적으로 들린다.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워 처연한 에세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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