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바이러스 등장 때마다 숙주로 의심받은 박쥐들
“인간이 박쥐 서식지를 파괴해 생긴 일” 학계 지적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숙주로 박쥐가 용의선상에 올랐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유전자가 박쥐에서 유래한 바이러스와 89%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질병관리본부의 발표도 나왔습니다.
박쥐가 바이러스 원인으로 의심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병 이전부터 메르스, 에볼라, 사스 등 악명 높은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 박쥐는 바이러스 전염 매개체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박쥐는 억울합니다. 박쥐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퍼진 것도 아니고요. 박쥐랑 스치기만 해도 바이러스가 옮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요. 박쥐는 어쩌다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적으로 낙인이 찍힌 걸까요?
◇박쥐가 가진 바이러스는 무려 137종?
박쥐 몸 안에 바이러스가 많이 있는 건 맞습니다. 2013년 영국 왕립학회보B에 발표된 연구(콜린 웹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교수팀)에 따르면 박쥐에겐 137종의 바이러스가 있고 이중 인수공통 바이러스, 쉽게 말해 인간에게 옮길 수 있는 바이러스가 61종이라고 합니다.
박쥐가 바이러스 주범으로 지목된 사례 중 한국에 가장 유명한 건 아마 2003년 대유행이었던 사스 바이러스일 겁니다. 학계에 따르면 관박쥐의 분변이 사향고양이 등을 통해 인간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2014년 발병 후 1만명을 숨지게 한 에볼라 바이러스도 박쥐에서 유래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죠. 1967년 독일 마르부르크 등에서 발생한 마버그 바이러스, 1998년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니파 바이러스, 2016년 한국을 두려움에 떨게 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각종 바이러스가 박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박쥐가 인간에게 직접 바이러스를 전파할까?
“박쥐가 불러일으킨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미 두 번이나 중국에서 발생했고, 따라서 향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예방할 연구가 시급하다.”
중국 과학자가 지난해 국제학술지 ‘바이러스’(Viruses) 3월호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바이러스를 61종이나 가진 박쥐가 다른 바이러스 숙주가 될 가능성은 이미 1년 전부터 제기된 겁니다. 중국 과학 아카데미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연구진은 박쥐를 코로나바이러스의 주요 숙주로 지목하면서 인간에게 질병을 야기할 수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중 알파(α) 코로나바이러스 17개 중 10개, 베타(β) 코로나바이러스 12개 중 7개를 박쥐가 가지고 있다는 걸 밝혔죠. 연구진은 특히 박쥐가 날 수 있는 포유류인 만큼 다른 육지 포유류보다 넓고 다양한 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 수 있기 때문에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모든 박쥐가 나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박쥐도 다 같은 박쥐가 아니고요. 인간에게 발견된 박쥐만 1,200종이 넘습니다. 전체 포유류가 6,000여종임을 감안하면 이중 20%가 각기 다른 박쥐인 셈입니다. 사스, 에볼라, 마버그, 니파, 메르스 등 각종 바이러스의 야생 최종 숙주로 지목된 박쥐도 다른 박쥐들입니다. 사스의 경우 관박쥐였고요, 메르스는 이집트무덤박쥐, 에볼라는 과일박쥐가 지목을 받았습니다.
박쥐가 직접 바이러스를 인간에게 감염시켰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사스 바이러스는 사향고양이를 거쳐 인간에게 전염됐고요. 니파 바이러스의 경우 돼지를 거쳐서, 메르스의 경우 낙타를 거치면서 인간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이러스 달고 사는 박쥐가 아프지 않은 이유는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기죠. 137종의 바이러스를 달고 사는 박쥐는 왜 아프지 않을까요? 특정 바이러스들이 박쥐 안에 있을 때는 괜찮았다가 다른 포유류에게만 가면 아프게 하는 이유 말이에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바이러스가 박쥐에서는 임상 증상을 나타내지 않는, 다시 말해 박쥐를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이유는 박쥐의 면역체계 덕분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지난 2016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된 논문에서 미국 클리블랜드클리닉 러너연구소 조지 스타크 등 연구진은 “인터페론알파(IFN-α) 유전자가 박쥐 조직 및 세포에서 발현하면서 바이러스와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드는 독특한 시스템을 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인간이 박쥐 탓할 자격 있나
1994년 호주에서 말과 사람들을 죽게 한 헨드라바이러스를 아시나요? 어느 날 갑자기 말이 픽픽 쓰러지더니 이 말과 접촉한 사람마저 사망에 이르게 한 바이러스인데요. 호주에서 말을 사육할 농장을 짓기 위해 울창한 숲을 밀어버리자 나무가 서식지인 과일박쥐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결국 과일박쥐들은 농장에 몇 그루 남지 않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살 수밖에 없었는데요. 말도 햇볕을 피하려고 나무 밑에서 쉬다가 과일박쥐 분변을 맞았는데, 이 분변을 맞고 병에 걸리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 말을 만진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게 헨드라바이러스입니다.
흥미로운 건 과일박쥐와 직접 접촉한 사람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관리연구실 실장은 “핸드라바이러스 연구 과정에서 과일박쥐를 의심하면서 어린 과일박쥐를 사육하는 사람을 조사했는데, 사육사들은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이는 박쥐 안에 있던 바이러스가 중간 숙주를 거치면서 병독성을 강화하거나 사람이 감염될 수 있도록 변이하는 과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과일박쥐가 가진 바이러스가 말에게 옮기는 과정에서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데요. 김 실장은 “박쥐 안에 있던 바이러스가 숙주를 거치는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인의 식습관이 바이러스 전파를 강화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는데요. 중국 과학 아카데미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연구진은 논문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숙주 역할을 하는 박쥐는 인간 근처에 서식하며 잠재적으로 바이러스를 인간과 가축에게 전염시킨다”며 “동물을 살아 있는 채로 도축하는 것을 선호하는 중국 음식 문화가 바이러스 전파를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우리(인간)가 초래한 것이다.”
김 실장의 설명에 따르면 해외 인수공통 감염 전문가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원인으로 인간을 지목합니다. 박쥐를 다른 동물에 노출한 게 인간 아니냐는 거죠. 김 실장은 박쥐를 들들 볶기 전에 사람이 깨우쳐야 할 건 없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도 야생에서 잘 살던 박쥐들을 잡아 와 다른 동물들이 바글대는 시장에서 그것도 산 채로 피를 흘리게 해 감염될 여지를 만든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박쥐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게 맞는지, 인간이 야기한 일이 아닌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정은 기자 4tmr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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