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아직 지방에 사십니까?
※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설 연휴 고향에 내려온 친구를 만났다. “서울에 터전을 잡기 잘했다”는 말로 시작 한 그와의 술자리는 최근 10억원을 우습게 넘어선 아파트 값을 안주로 꽤 이어졌다.
그는 지난해부터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집값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월급의 상당 부분을 떼내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하우스 푸어’가 된 서울살이 애환보다 중소도시에선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 생겼다는 자부심이 더 강한 듯 했다.
부러웠다. 동시에 서울 등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더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강남과 마용성(마포ㆍ용산ㆍ성동)의 똘똘한 한 채를 처분하면 내가 사는 곳의 아파트 5, 6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사람과 돈이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인구 절반이 넘는 2,592만명이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모여 사는 나라가 됐다. 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구가 많은 한쪽은 한정된 자본이 몰려 더욱 팽창하는 반면 지방의 경우 부동산 침체와 의료, 교육기반이 무너지는 양극화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경고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러다 국민의 70~80%가 수도권에 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심하게 말하면 ‘아직 지방에 사느냐’는 말을 안부로 묻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를 증명하듯, 지방쇠락으로 가는 스톱워치는 재깍재깍 작동하고 있다.
올 들어 광역시인 대구에서도 취학아동이 급감, 초등학교가 폐교했다. 우리나라 두 번째 경제권이라는 부산, 울산, 경남에서도 20~30대 인구 감소가 심각하다. 지역 내에 좋은 일자리가 줄어드니 대학 졸업 후 뿌리를 내리기 힘든 구조다.
지역의 산업단지에선 명절 상여금은커녕 회사 문만 닫지 않으면 좋겠다는 한숨이 가득했다. 강원도 일부 지역엔 신생아 분만 병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러니 지방살이는 팍팍해져만 간다. 자녀를 위해서라도 지금 서울로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인구가 줄어들자 투자 축소, 저출산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경제ㆍ사회시스템 붕괴를 재촉하는 악순환이 진행 중이란 증거다. 대기업 순환출자 고리만큼이나 끊기 힘든 고질병이다.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부와 가난이 대물림 되는 시대가 올 것이란 불안을 떨쳐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논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 공언한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은 ‘적폐청산’과 ‘조국 파동’에 묻혀 아련히 사라졌다.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지역 살리기는 한계를 드러냈다. 혁신적 지방분권 개헌 구상 등 강력한 국가균형발전 전략을 추진하겠다던 약속에도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할 대안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한민국엔 지방선거는 있으나 지방자치는 없다’거나 ‘지금 정치환경에선 세종대왕이 와도 좋은 지자체장이 될 수 없다’는 어느 정치인들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물론 지역균형발전은 보수, 진보를 떠나 어느 정부에서도 풀기 힘든 난제다. 하지만 일방적인 성장보다 분배와 균형을 강조한 정부이기에 지금의 현실이 더욱 아쉽다.
문 대통령은 얼마 전 신년기자회견에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문득 한가지 바람이 떠올랐다. 남은 임기만큼은 조 전 장관을 생각하는 만큼 지역에 사는 국민들도 좀 헤아려 달라고 말이다.
박은성 지역사회부 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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