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가 복수를 위한 총을 만든 뒤 이렇게 말하죠. ‘뭐든 예뻐야 해.’ 책도 그래요. ‘예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표지 일러스트를 직접 그렸다. 1년간 크로키를 배울 때 염두에 뒀던 일이다. 그가 만든 책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됐다는 이유를 알 만했다.
27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1인 출판사 ‘녹색광선’ 박소정(44) 대표는 출판사 차리기 전부터 ‘문학 덕후’라 불렸다. 17년간 인사ㆍ교육을 담당했는데 맡은 업무 중에 ‘직원들에게 책 권하기’가 제일 신났다. 자기계발서보다 문학을 더 열심히 권했다.
그랬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40대 초반, 회사를 그만뒀다. 마음에 쏙 드는 특별한 책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서다. “출판사 이름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제목에서 따왔어요. 녹색광선은 해질 무렵 드물게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인데, 영화 주인공들은 이걸 무척이나 기다리거든요.” 출판을 시작한 이유와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과학 전문 출판사냐”, “제다이의 광선검 같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출판사 첫 책을 찾아 1년 넘게 헤맸다. 지난해 1월 드디어 펴낸 첫 책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 알려지지 않은 근대 문학 작품을 발굴하겠다는 출판사 정체성과 기묘하게 얽힌 제목이다.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퇴직금이 밑천이라 판권에다 큰돈을 걸긴 어려웠다. 저작권 문제가 없는 고전이 상대하기 쉬웠다. 첫 책이 이리 나오자 두 번째 책은 ‘감정의 혼란’(슈테판 츠바이크), 세 번째 책은 ‘눈보라’(알렉산드르 푸시킨)로 이어졌다. 양장에다 크로키를 더해 예쁘게 내놨다.
원래 목표는 ‘1년에 3,000부, 5년간 1만부’였다. 일본의 1인 출판사 ‘나츠하샤’의 원칙에서 따온 것인데, 성적은 의외로 좋다. ‘미지의 걸작’과 ‘감정의 혼란’은 출간 1년도 안 돼 3, 4쇄를 찍었다. ‘눈보라’는 출간 1주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성적표 못지않게 기쁜 건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감정의 혼란’은 출간 석 달 만인 지난해 9월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됐다. 지난 1월 내놓은 ‘눈보라’는 “녹색광선의 색깔과 정말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던 독자의 추천이 출간의 계기가 됐다. 그간 생겨난 팬들은 이제 국내 대가의 고전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심심찮게 낸다.
그렇다고 현대물을 포기한 건 아니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도 판권 계약을 했어요. ‘사랑과 권태’에 대해 도발적 질문을 던진 현대 작가의 소설을 준비 중이에요. 우리 독자도 꽤 흥미를 가질 거라 믿어요.”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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