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설에 경남 합천 처갓집을 다녀왔다. 결혼하고 17년 째 명절과 가족 모임 등을 이유로 해마다 두 세 번 찾지만 겉으로 봐선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도리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이곳에 빈집이 하나 둘 느는 게 눈에 띌 정도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새 돈벌이 찾아 도시로 떠나고 어르신들은 병이나 노환 같은 세월이 가져다 준 무게를 짊어지다 세상을 떠났다. 한 때 이 마을은 40가구가 넘었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허전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자식·손주·조카가 명절에 머물며 위로해 드리지만 그건 잠시뿐.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날 때 장인, 장모 얼굴의 주름은 지난해보다 더 깊어 보였다.
지난해 11월 한국고용정보원 발표에 따르면, 전국 시군구 228곳 중 42.5%에 달하는 97곳이 인구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이들 지역은 20∼39세 여성 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소멸위험지수가 0.5 미만인데, 30년 정도 지나면 마을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2005년에만 해도 마을이 사라질 걸 걱정하는 지방자치단체는 단 한 곳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도권을 뺀 대부분 지역이 소멸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사실 그 동안 농산어촌을 살린다며 새 도로 놓고, KTX역 만들고, 서울에 있는 공공 기관을 옮겼지만 상당수 공무원과 가족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그나마 지방 살던 사람들조차도 좋아진 교통 덕에 서울로만 향한다. 수도권에 쏠린 사람들을 전국에 흩어지게 하자는 노력은 수도권 밀집도를 높였다. 대학 갈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지방대가 늘고 수도권 대학은 입학 경쟁률이 여전히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신 2,3년전부터 중앙정부와 지자체들이 도시 청년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든 주거비, 생활비와 취업 전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청년들을 적극 뒷받침하고 나섰다. 단순히 땅 제공하고 농사짓는 비용 대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먼저 지방에서 살거나 일할 기회를 주면서 시골 생활에 적응하고 그 마을을 이해한 뒤 스스로 ‘시골에서 살아 볼만하다’고 판단하면 창업을 돕거나 협약을 맺은 지방 기업에 일자리를 알선해 주고 있다.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충남 서천에서 처음 시도한 ‘삶기술학교’, 서울시와 경상북도가 손잡고 시작한 ‘청정경북 프로젝트’, 경북이 자체 진행하고 있는 ‘도시청년시골파견제’ 등을 통해 수 백 명의 도시 청년들이 낯선 시골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중 청년들이 2년 전 경북 문경의 고택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만들어 하루 수 백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화수헌’ 같은 성공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물론 짧은 시간에 지방을 살리기 위해 큰 기업이 필요하고 실제 그런 곳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마을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에 있는 기업의 사람이다. 그 기업이 떠나면 그들도 떠나버린다. 그 보다는 마을 밖의 누군가가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앙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기존 주민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지난해 충남 서천 한산마을을 찾은 도시 청년들은 버려진 빈집을 고쳐 살기 시작했다. 이 마을 어르신들은 손주 같은 젊은이들이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품을 가지고 굿즈(기념품)나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 해도 귀찮기는커녕 기분 좋다고 했다. 오히려 반찬 떨어지는 거 없는지, 집에 고장 난 거 없는지 자식처럼 챙겨 줬다. 심지어 빈집을 무료로 내주면서 고쳐서 뭐든 해보라고까지 한다. 청년들은 어르신들과 교감을 통해 삭막한 도시에서는 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한다며 고마워했다. 여러 청년들은 아예 주소를 도시에서 시골로 옮겼다. 이 마을의 빈집은 줄어들고 있다.
박상준 이슈365팀장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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