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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굿모닝 2020s] ‘미국의 세기’는 현재진행형… “친미ㆍ반미 아닌 용미 지혜를”

입력
2020.01.28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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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팍스 아메리카나 

수천 개의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말리부 페퍼다인대의 잔디밭. 9ㆍ11테러 18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해 9월 8일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준비됐다. 캘리포니아=AP연합뉴스
수천 개의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말리부 페퍼다인대의 잔디밭. 9ㆍ11테러 18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해 9월 8일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준비됐다. 캘리포니아=AP연합뉴스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출판인 헨리 루스였다. 그는 1941년 자신이 출간한 잡지 ‘라이프’에 ‘미국의 세기’라는 글을 발표했다. 루스의 메시지는 미국이 고립주의를 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세계사회를 주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있었다. 루스의 주장과 예견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미국의 세기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말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다. 팍스 아메리카나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컫는다. 로마 제국이 이끌던 당시 세계 평화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 것을 활용한 개념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에 앞서 영국이 주도한 세계 평화인 ‘팍스 브리타니카’가 존재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라틴어 ‘팍스’는 ‘평화’를 뜻한다. 이 점을 주목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전후 소련과의 냉전, 베트남 전쟁 등을 돌아볼 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란 미국 중심의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해 이 글에서 쓰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이 정치적ㆍ군사적ㆍ경제적ㆍ문화적 차원에서 지구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시대라는 의미를 가진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는 통계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7년 미국은 세계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4.4%를 차지했다. 중국이 15.4%, 일본이 6.1%, 독일이 4.6%로 뒤를 이었다. 기업 활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또한 압도적이다. 2018년 브랜드 가치에 따른 세계 10대 기업 가운데 미국 이외의 기업은 삼성, 도요타, 메르세데스-벤츠뿐이었다. 애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가 1~5위를 차지했다.

국방비의 경우도 미국이 절대적이다. 1991년 소련 연방이 붕괴한 후 미국의 국방비 예산은 전세계 국방비 예산의 절반에 육박했다. 중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영국 등을 포함한 2~10위 국가들의 국방비를 합해도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다. 2017년 미국의 국방비는 6,000억달러를 넘긴 반면, 중국은 1,500억달러 정도를 기록했다.

문화적 차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표 중 상징적인 것은 대학의 경쟁력이다. 2013년 중국 상하이 지아오퉁대가 선정한 세계 대학 랭킹 10위 안에 들어간 비(非)미국 대학은 영국 케임브리지대(5위)와 옥스퍼드대(10위)뿐이었다. 2014년 영국의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랭킹에서도 10위 안에 들어간 비미국 대학은 영국 옥스퍼드대(3위), 케임브리지대(7위), 임페리얼 칼리지대(10위)뿐이었다.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캘리포니아공대, 매사추세츠공대가 상위 순위를 휩쓸었다.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는 한 나라의 힘을 평가할 때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파워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봤듯 경제ㆍ군사ㆍ문화의 세 측면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은 21세기에도 건재하다. 나이는 2015년 발표한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평가한다. “미국의 세기가 탄생한 출생연도는 1941년도이고, 사망연도는 아직 미정이다.”


 ◇2020년대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미래 

1945년부터 2020년까지의 세계사를 돌아볼 때 미국의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도전받아 왔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 1980년대 이후에는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19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힘을 잃었고, 일본 역시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경유하면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EU의 경우 미국보다 경제 규모가 크지만, 브렉시트에서 볼 수 있듯 최근 통합의 구심력과 이완의 원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뤄 왔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의 최대 경쟁자는 중국이다. 중국은 고속성장으로 일본을 넘어서 세계경제 규모 2위를 차지함으로써 ‘G2’시대를 열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절정기는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1년부터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까지였다. 금융위기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함의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의 굴기(崛起)는 눈부셨고, 머잖아 중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시대, 즉 ‘팍스 시니카(Pax Sinica)’가 열릴 것으로 예견됐다.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는, 르몽드 디폴로마티크가 주장하듯,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팍스 시니카에 대해선 이 기획에서 따로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펼친 이는 나이다. 나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이뤄진 하드파워, 협력과 설득을 통해 자발적 순응을 이끌어내는 소프트파워,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결합한 스마트파워를 주목할 때 2010년대에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국가는 아직 없다고 단언한다. 중국의 부상이 만만치 않지만 미국을 압도하긴 어렵다고 결론짓는다.

정치학자 함재봉 등은 ‘팍스 아메리카나 3.0’에서 나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명한다. 이들은 하이테크, 인구와 이민, 대학, 경제ㆍ군사의 병진이라는 미국의 ‘펀더멘털’에 주목해 여전히 미국의 세기임을 강조한다. 특히 함재봉은 금융위기 이후 미국 부활의 힘을 ‘창조적 파괴’에서 찾는다. 끝없는 혁신을 추구하는 ‘창조적 파괴’의 힘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2020년대에 팍스 아메리카나는 그렇다면 계속되는 걸까. 나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미국 경제와 정치의 힘이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의 미국산 제품 추가 구입 등의 목표를 잠정 달성했다. 2020년대가 지나가면서 미국과 중국 간 경제전쟁이 더욱 치열해지겠지만, 중국이 미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따라 잡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 양자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얼굴을 마주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오사카=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 양자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얼굴을 마주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오사카=AP연합뉴스

둘째, 지구적 헤게모니 본래의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헤게모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적 설득과 도덕적 동의다. 미국이 세계 지배에서 설득과 동의를 얻고 있는지에 대해선 충분한 반론이 가능하다. 어느 나라든 존재하는 반미주의가 이를 증거한다. 문제는 미국을 대신해 지구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나라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을 능가할 헤게모니 국가가 등장할 때까지 팍스 아메리카나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미래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두 얼굴은 문명과 야만이다. 다원주의를 중시하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문명을 보여준다면,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식 폭력주의는 야만을 드러낸다.

존 다우어가 지적하듯, 2010년대 기준 세계적으로 미군이 존재하는 나라는 80개국이고, 부대는 800군데 정도이며, 그 인원은 15만명에 달한다. 무기 판매, 독재정권 원조, 대리전, 그리고 직접적 무력 개입이라는 수단을 통해 미국은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이러한 야만으로서의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세기에 대한 결코 작지 않은 우려를 갖게 한다. 팍스 아메리카나에 부여된 숙제인 셈이다.

 ◇한국사회와 팍스 아메리카나 

우리 사회에 팍스 아메리카나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1945년 광복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산업화는 물론 민주화, 그리고 남북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우리 사회에서 미국이란 존재가 갖는 의미는 프랑스 지식인 기 소르망이 ‘메이드 인 USA’에서 지적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매일 우리는 미국적인 것들을 소비한다. 그렇기에 미국이라는 강박적 존재는 이성적 통찰보다는 감성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이 ‘미국산’이다.”

오늘날 어느 나라든 친미적 성향과 반미적 성향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도 1980년대 반미주의가 본격화된 후 친미와 반미가 팽팽히 맞서 왔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앞에서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앞에서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변화하는 동북아의 상황을 주목할 때 우리 사회의 미래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른바 ‘용미(用美)’다. 용미의 방법은 미국에 때론 지혜롭게, 때론 당당하게 대응함으로써 우리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이 ‘포지티브섬 게임’이 될 수 있게 하는 전략을 뜻한다. 친미와 반미를 넘어서는 이러한 용미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선 미국과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객관적 이해 및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직업’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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