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 흥행 돌풍
지난해 칸 퀴어종려상 수상작… “매 장면이 고전 미술품” 입소문
동성애자 감독ㆍ단역 外 모두 여성… 여성 간 연대와 사랑 세밀히 그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초상화 제작을 거부하던 엘로이즈(왼쪽, 에델 에넬)는 그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노에미 멜랑)에게 마음을 연 뒤 캔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다웠다.

지난 20, 21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과 서대문구 창천동 극장을 찾았다. 평일 늦은 밤 시간임에도 좌석이 가득 찼는데, 그 가운데 70%는 20, 30대 젊은 여성 관객들이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이 영화를 봤다는, 이른바 ‘N차 관람객’ 물결도 빈 말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벌써 세 번 봤다는 30대 여성 최모씨는 “처음 봤을 때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여운이 길었다”며 “집에 돌아온 뒤에도 자꾸 생각나 다시 관람했는데 볼 때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와 더 좋았다”고 말했다.

프랑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하 ‘초상’) 이야기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맞붙은 끝에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받는 데 그쳤으나, ‘기생충’ 못지않게 훌륭한 영화라고,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드시 봐야 할 영화로 꼽혔다는 바로 그 영화다.

‘초상’은 유명 배우 한 명 나오지 않는 예술영화다. 지난 16일 개봉 즉시 일일 박스오피스 7위에 오르더니 조금씩 순위가 오르며 21일 5위까지 상승했다. 예술영화는 1만명만 넘겨도 대박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는 개봉 1주일 만인 21일까지 5만명 가까이 모았다. 설 연휴가 지나면 10만명은 무난히 넘길 것이란 전망이다. 이 정도면 ‘아트버스터(예술과 블록버스터의 합성어)’라 부를 만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러모로 고전 회화를 연상시킨다. 바닷가에 서 있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담은 미장센은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로 유명한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특히 여성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CJ CGV에 따르면 22일 기준 예매자의 77.5%가 여성이고, 전체 관객 중 20, 30대 비중은 무려 72.5%에 달했다. 젊은 여성 연예인들도 자발적 홍보에 나서고 있다. 그룹 위키미키 김도연은 21일 자신의 SNS에 “어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봤는데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보러 갈 것 같다”고 적었고, 그룹 러블리즈 멤버 지수도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SNS에 올렸다.

이 같은 열광에 수입사도 놀라는 눈치다. 수입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임진희 팀장은 “예술영화는 대개 30대 관객의 비중이 높은데 이 영화는 20대 관객이 가장 많고 10대 비중도 높다”며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SNS에서 입소문이 났는지 개봉 전 예매량이 1만장을 넘겼는데 예술영화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말했다. 개봉 첫날 첫 상영 관람객에게 영화 속 캐릭터가 그려진 배지를 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평일 아침 행사였음에도 팬들이 몰리면서 ‘배지 대란’이 일기도 했다.

영화는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여성 화가 마리안(노에미 멜랑)이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고 브르타뉴 지역의 외딴 섬으로 향하면서 시작한다. 엘로이즈에겐 초상화 제작이 죽음과도 같은 것. 마리안은 초상화 제작을 극구 피하는 엘로이즈 때문에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접근한 뒤 관찰한 기억을 조합해 초상화를 조금씩 그려 나간다. “나와 비슷하지도,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다”는 엘로이즈의 평에 그림을 새로 그리기 시작하는 마리안. 화가와 모델로 만난 이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이별을 피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을 여성들의 축제에 간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는데, 마리안은 이 때의 모습을 기억해 훗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그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금지된 사랑을 그린 통속극 같은 면모도 있지만, 최소한의 인물과 구도, 사건만으로도 이 영화는 동성애, 여성 간 연대, 예술과 대상의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풀어낸다. 여기다 각 장면, 장면이 압권이다. 화가와 모델 간 관계와 변화를 인물의 위치ㆍ시선ㆍ카메라 각도 등으로 드러내면서 불과 물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보여 준다.

이 때문에 관객들 사이에선 “매 장면이 고전 미술작품 같다” “미술작품보다 아름다운 영화”라는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특히 엘로이즈의 눈물과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악장이 한데 어우러진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에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영화 외적인 이야기들도 화젯거리다. ‘초상’의 감독 셀린 시아마는 주연 배우 아델 에넬과 연인 사이였던 동성애자이자 페미니스트다. 데뷔작 ‘워터 릴리스’부터 ‘톰보이’ ‘걸후드’ 그리고 이번 영화에 이르기까지 시아마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남성적 시선 해체’를 줄곧 주장해 왔다. ‘초상’ 또한 촬영감독, 프로듀서 등이 모두 여성이었고, 출연진 또한 일부 단역을 제외하곤 모두 여배우다. 영화 속 여성들간의 평등한 연대는 영화 밖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또 다른 포인트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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