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선 아기 주먹만큼씩 한 일년감이 다닥다닥 시든 잎 사이에서 홍보석처럼 선연한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박완서의 ‘미망’에 일년감이 나온다. 크기는 아기 주먹만 하고, 루비 같은 붉은빛이며, 텃밭에서 자란다는 이것은 무엇일까? 바로 토마토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상식과 달라서 놀랄 때가 있다. 한국인에게 토마토는 그런 것 중 하나다. 설탕을 솔솔 뿌려 시원하게 먹던 토마토가 채소라는 지식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 식문화에서는 그렇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토마토를 무엇으로 인지했을까? 토마토는 한해살이 열매로 일년감이라 하거나, 나무가 아니라 땅에서 난다고 땅감이라 불렸다. 현재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와 중국 지린성의 동포들도 이 말을 쓴다. 구한말에 쓰인 서양 조리법 책에는 토마토케첩이 일년감장으로 소개되었다. 감이란 이름대로, 한국 사람에게 토마토는 과일이었다.
9월이면 1학기가 가을에 시작되는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온다. 한국의 가을 시장을 처음 둘러보고 온 유학생들이 하는 말이 있다. ‘선생님, 한국 토마토가 참 예뻐요. 처음 보는 색깔이에요.’ 감이 나지 않는 땅에서 온 학생에게 홍시가 토마토로 보인 것이다. 어느 날 카페에서 한 외국인이 주문한 과일 빙수에 토마토가 올라가 있다고 항의하는 것도 보았다. 자신은 채소 빙수를 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마토로 요리하는 문화권에서 토마토는 채소일 뿐이다.
말은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대로 만들어진다. 채소를 보고 과일이라고 생각한 한국인이 있고, 과일을 보고 채소라 생각하는 이방인이 있다. 말에는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식마저 보여 주는 힘이 있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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