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거대 기업을 일궈냈다. 껌을 파는 식품업으로 시작해 유통ㆍ관광ㆍ석유화학 분야를 아우르는 그룹을 만들어냈고, 70년 가까이 ‘왕좌’에서 그룹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현역에서 가장 늦게까지 활동한 1세대 기업인으로도 꼽힌다. ‘실패를 모르는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큰 업적을 남겼지만, 폐쇄적인 경영 방식으로 ‘기업을 사금고화한다’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법정에서 배임과 횡령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는 오명도 남겼다. 신동주, 신동빈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을 거치며 말년에는 결국 자신이 일군 회사에서 해임되는 등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일본 오일 사업 실패 후 비누로 재기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공부해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컸던 청년 신격호는 아내(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의 어머니인 고 노순화 여사)를 남겨둔 채 1942년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신문ㆍ우유 배달 등으로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와세다대 화학공학과 야간부를 다니며 문학도를 꿈꿨던 청년은 성실과 신용으로 ‘조선인’이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평소 그를 눈여겨 본 한 일본인의 출자로 1944년 커팅 오일 제조 공장을 세웠다.

신 명예회장의 첫 사업은 대실패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동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공장이 두 번이나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1946년 허물어진 군수 공장에서 비누 회사를 차려 재기에 성공했다. 생활용품이 부족했던 전후 시기의 특수를 누린 것이다. 그는 사업 시작 1년 반 만에 일본인에게 신세 진 돈을 모두 갚고 따로 집을 한 채 사 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비누에 이어 화장품으로 재미를 보던 신 명예회장은 껌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주일미군이 씹던 껌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인기 상품이었다. 껌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던 만큼 신 명예회장은 금세 큰돈을 벌었다. 1948년 그는 종업원 10명과 함께 자본금 100만엔을 들고 법인 사업체를 설립하며 ‘롯데’ 시대를 시작했다. 롯데라는 이름은 문학도 신격호가 심취해 있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인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1961년 신 명예회장은 초콜릿 시장이 커질 것을 예감하고 과감하게 투자해 유럽에서 기술자와 설비를 들여왔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고, 이후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경영 방침은 롯데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식품업으로 자금을 마련한 그는 롯데 상사, 롯데 부동산,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을 세우며 한때 일본의 10대 재벌 자리까지 올랐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롯데지주 제공
과거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제과 공장을 시찰하던 모습. 롯데지주 제공
 ◇고국에 세운 롯데 왕국 

1965년 한ㆍ일 수교로 양국간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자 신 명예회장은 조국에서 사업 기회를 잡기로 했다. 1967년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한국롯데’ 시대를 열었다. 조국에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신 명예회장의 꿈과 해외 자본으로 국내 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열망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외국인투자기업에 최소 5년간 취득세, 소득세, 법인세 등을 면제해주는 외자도입특례법을 제정하며 재일교포 신격호가 이끄는 롯데에 파격적인 특혜를 제공했다.

이는 롯데에게 쏟아진 특혜 세례의 시작이었다. 이후 1973년 롯데가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 부지를 매입할 때도, 1980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산업은행을 사들일 때도 정부의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1988년 부산 부전동 롯데호텔 부지 5,800평을 사들일 당시 자본금의 99.96%가 일본인 소유란 이유로 외국인투자촉진법을 적용 받아 취득세와 등록세 191억원을 면제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롯데그룹 현해탄 경영을 시작한 신 명예회장은 1973년 호텔롯데, 롯데기계공업, 롯데파이오니아를 설립하고 이듬해 롯데상사를 세운 뒤 훗날 롯데칠성음료가 되는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했다. 1976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인수에 이어 1978년 삼강산업(현 롯데푸드)과 평화건설(현 롯데건설)를 인수했고, 롯데햄ㆍ롯데우유(현 롯데푸드)를 설립하는 등 신 명예회장의 사업 확장은 파죽지세였다. 1979년 호텔롯데에 이어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을 준공하며 당시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통ㆍ관광 산업을 선점했다. 롯데는 1983년 24개 계열사에 2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한국 10대 재벌그룹이 됐다.

신 명예회장은 관광산업에 특히 의욕이 넘쳤다. 국내에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을 짓기 위해 전세계 유명 호텔들을 답사했고, 건물 설계와 인테리어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공사 현장도 수시로 방문하며 안전 문제를 철저하게 챙겼다. 그는 일본 롯데가 번 돈을 호텔롯데를 통해 국내에 대거 투자했다. 호텔롯데의 대주주가 일본롯데홀딩스인 것도, 롯데지주가 생기기 전까지 호텔롯데가 지주회사 역할을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이 30여년간 품어온 숙원사업이었다. 그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계속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냐”며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싶어할 만큼 세계에 자랑할 만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건축물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호남석유화학 인수 성공으로 그는 날개를 달았다. 여천단지에 공장을 지어 몇 년 산업계에 필수인 화학제품 상업생산을 시작한 호남석유화학은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꿔 그룹의 든든한 한 축으로 성장했다.

 ◇폐쇄경영∙왕자의 난에 발목 잡힌 말년 

맨손으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에 ‘롯데 왕국’을 세웠지만, 무한증식을 가능케 한 폐쇄적 경영은 결국 신 명예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기업공개(IPO)를 극도로 꺼려 일부 회사를 빼곤 비상장 상태를 유지했고, 일본 롯데 계열사는 아예 한 곳도 상장하지 않았다. 현재 롯데지주와 함께 그룹의 한 축을 이루며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호텔롯데는 여전히 비상장 기업이다. 신 명예회장은 친동생인 신춘호 농심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 등과 회사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등 잦은 송사를 겪었는데, 오랫동안 유지해온 폐쇄적 경영 방식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015년 후계구도에서 밀리며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자리에서 쫓겨난 장남 신동주가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동생 신동빈을 공격하며 ‘왕자의 난’이 시작됐다. 아버지의 뜻과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두 아들 간 주장이 엇갈리면서 신 명예회장의 건강과 판단력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신동빈이 광윤사 이사직에서 해임되고 롯데면세점 롯데월드타워점 사업권을 잃으면서 신동빈의 경영권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2016년 주주총회에서 신동빈이 주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왕자의 난은 신동빈 측의 승리로 굳어졌다.

왕자의 난 과정에서 롯데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해임된 신 명예회장에 대해 2017년 대법원이 한정 후견인을 지정함에 따라 다시금 건강 악화 문제가 불거졌다. 그 해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주총이 신 명예회장에 대해 이사직 재선임 불가를 결정하면서 롯데의 신격호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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