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은 한국 현대사의 큰 변곡점이다. 총을 쏜 자, 총에 맞은 자를 모를 한국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 이들 이름은 제대로 불리지 않는다. 22일 개봉하는 ‘남산의 부장들’도 예외는 아니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대통령은 ‘박통(이성민)’으로 나온다. 박통에게 총을 겨누는 중앙정보부장은 ‘김규평(이병헌)’이다. 김규평과 충성 경쟁을 벌이다 총탄을 맞는 대통령 경호실장은 ‘곽상천(이희준)’이다. 박통에게 버림 받고 미국으로 가서 박통 정권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는 전 중앙정보부장 은 박용각(곽도원)이다.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영화는 동명 논픽션을 밑그림 삼았다. 10ㆍ26 사건 이전 40일에 집중한다. 부마사태로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를 두고 다툰다. 인물 묘사도 실제적이다. 경상도 말투를 쓰는 박통은 ‘임자’라는 단어를 곧잘 쓰고, 막걸리에다 시바스 리갈도 즐긴다. 옷도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옷을 만들었던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희준은 곽상천 연기를 위해 체중을 25㎏이나 불렸다. 차지철 같은 몸집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런데, 실명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제작사 측 설명은 “허구가 많아서”다. 김규평이 박용각을 만나 회고록 발간을 막고, 박용각 암살을 위해 곽상천과 첩보전을 펼치는 모습 등에서 상상력을 발휘했다. 영화 내용은 원작 논픽션과 70% 정도 동일한 수준이지만, 허구가 있어 인물들 이름을 실제와 다르게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허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김재규를 김재규라, 차지철을 차지철이라 부를 수 없는 건 한국적 분위기 탓이다. 한 중견 감독은 “실존 인물을 실명으로 다루거나 비판할 때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고 토로했다. ‘학습효과’도 있다. 10ㆍ26 사건을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그때 그 사람들’(2005)은 ‘대통령 각하’ ‘김 부장’ ‘주 과장’ 등으로만 표현했으나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면서 일부 장면이 잘린 채 상영됐다.
미국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바이스’(감독 애덤 맥케이)의 경우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 전 미국 부통령의 삶을 그리면서 주변 정치인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부시는 지도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수다스러운 인물로 묘사되고, 럼스펠드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부정적 묘사에도 소송은 없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미국은 1940년대부터 실명 정치극을 만들어 왔지만, 군사정권 시기가 길었던 한국에선 그런 관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한국에선 정치적 논란을 피해가는 게 상책이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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