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영화 속 ‘룸살롱 클리셰’의 미화
주진모 사건으로 드러난 관음의 일상
‘꽃이 되긴 싫어’ AOA 깨달음의 의미
2015년 11월 개봉해 관객 700만 명 이상이 든 영화 ‘내부자들’의 충격적인 성구매 장면. 남성 권력 집단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쓰이는 흔한 클리셰다. 사진은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의 스틸컷. 쇼박스 제공

전날 밤의 성구매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한 이였다. 문인들과 술자리의 끝이 그랬나 보다. 수습기자였던 내가 말했다. “그거 범죄잖아요.” 선배는 귀엽다는 듯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라며 허허 웃었다. 내가 화가 났던 건 그가 그런 경험을 여성이자 후배인 내게 말해서가 아니었다. 마치 낭만적인 한밤의 꿈처럼 미화해서다. 그의 말만 들으면, 자신은 시인 이상이고 여성은 금홍이었다.

내가 세상을 잘 몰랐던 건 맞는 듯 하다. ‘범죄도시’ ‘내부자들’ ‘베테랑’. 최근 5년 새 ‘대박’ 난 영화 몇 편만 추려도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모두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룸살롱 클리셰(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다. 조직폭력배나, 검사, 재벌, 기자 같은 남성 권력이 주인공인 영화들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된다. 적게는 600만, 많게는 1,300만 명 이상이 본 이들 영화에서 여성 단역들은 남성 주연의 힘, 폭력성 혹은 정의감을 살리려 술을 따르고, 옷을 벗어야 한다. ‘세상이 다 이렇잖아.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맞닥뜨릴 때마다 몹시 불쾌하다. 이런 장면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정말 필요한가. 여성들은 그렇게 소비되고, 남성의 폭력은 일상이 된다.

최근 해킹으로 온라인에 유출된 배우 주진모씨와 동료 배우들이 주고받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 속 현실은 어떤가. “연예인 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갑질 성매매를 하는 정황, 여성의 몸을 구체적으로 품평하는 모습, 비동의 유출로 추정되는 촬영물이 있었다”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성명에 비춰,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가수 정준영씨의 단체대화방이 떠올라 기시감마저 든다. 놀라운 건 이런 댓글이나 SNS 반응이다. “그냥 잘 노는 인싸(인사이더)들 대화 같던데 이게 뭐가 문제야” “솔직히 털면 안 나올 남자가 어디 있냐. (저런 게) 정상이다.” 불법 유출의 피해자라는 온정의 눈길도 있다. “협박에 응하지 않았으니 큰 용기를 낸 거다.” “해킹 범죄자들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 폭력과 관음(觀淫)은 이렇게 정당화된다. 이를 견디지 못해 스러져간 여성들을 향한 죄의식은 누구의 몫인가.

가학의 시선은 여성 아이돌 역시 감당해야 한다. 멤버 찬미씨의 어머니 임천숙씨를 인터뷰한 걸 계기로 ‘입덕’한 그룹 AOA의 데뷔 초 무대를 되돌려 보며 서글펐다. 대부분 10대였던 이들의 몸을 카메라는 지독하게 훑었다. ‘짧은 치마’를 부르며 안 그래도 짧은 미니스커트의 지퍼를 올리는 춤을 춰야 했고, 딱 붙는 핫팬츠로 몸매를 드러내야 했다. 어느덧 데뷔 8년 차, 이들은 스스로 희망의 싹을 틔웠다. 신곡 ‘날 보러 와요’에서 AOA는 서부 카우보이 차림으로 장총을 들었다. 팬들은 이들에게서 성장을 봤다. 폭발적 반응을 일으킨 커버곡 ‘너나 해’에서 지민의 랩 “솜털이 떨어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나는 나무다)”는 그래서 깨달음의 고백일 테다. 나이는 뒤로 물리고 서로 이름을 별칭처럼 부르며 쌓아온 동등한 관계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룹 이름이 ‘(여자)아이들’이라서 주목을 받은 신인 아이돌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소속사가 붙인 괄호의 의미를 우리도 모르겠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했다. “영어 ‘아이(I)’에 ‘들’을 붙여 ‘여섯 명의 개성이 모인 팀’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괄호 속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상업 자본주의의 어쩌면 최전선에 선 여성 아이돌 그룹들의 진화를 보며, 그나마 세상을 바꿀 에너지를 느끼는 건 다행인가, 불행인가. 젠더 폭력의 가해자들, 그리고 그 동조자들의 자각도 머지 않았는가. 이 글을 읽고 ‘그래서 뭐가 문제야’ 하는 당신 말이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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