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호출기 이질적 진화… 한국선 ‘음성’ 사서함, 일본선 ‘문자’ 메시지로
당초 숫자만 송신되던 개인용 무선호출기가 한국에서는 음성, 일본에서는 문자 위주의 송신기기로 다르게 발전한 것은 기술 혁신에서 문화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일러스트 김일영

이미 추억 속의 물건이 된 ‘삐삐’라고 불리던 놈이 있다. 휴대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90년대에 널리 사용된 개인용 무선호출기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층의 큰 사랑을 받아 한때 가입자가 1,500만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휴대폰 전에 개인용 무선호출기가 이 정도로 대중화된 지역은 세계적으로 드문데, 와중에 일본은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선호출기 사랑이 유난했던 지역이다. 일본에서는 ‘포켓 속에 넣고 다니는 벨’ 이라는 뜻에서 ‘포케베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구분을 위해서 일단 한국의 ‘삐삐’, 일본의 ‘포케베루’라고 지칭하겠다.

무선호출기를 사용한 적이 없는 독자를 위해 잠깐 사용법을 설명하자. 호출기에는 휴대폰처럼 고유번호가 부여되지만, 목소리를 주고받는 통화 기능은 없다. 전화와 동일한 방법으로 번호를 호출해 연결이 되면, 통화가 가능한 전화번호를 다이얼을 눌러 입력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러면 호출을 받은 상대의 호출기가 ‘삐삐’ 소리를 울리고, 연락을 기다리는 전화번호가 액정화면에 표시된다. 호출을 받은 상대가 표시된 번호로 전화를 하면 비로소 통화가 성사되는 방식이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이동 중에 호출을 받으면 주변의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곤 했다. 요즘도 카페나 푸드코트 등에서 음식이 준비되면 소리나 진동으로 호출해 주는 단말기가 이용되는데, 예전에 유행하던 무선호출기의 단출한 형태이다.

바로바로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휴대폰 이용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삐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재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호출기 액정에 표시되는 숫자를 암호처럼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큰 인기였다. ‘8282’는 ‘빨리빨리’를 의미했고, ‘1004’는 ‘천사’, ‘1010235’는 ‘열렬히 사모’한다는 연인 사이의 메시지였다. 숫자로만 소통하는 삐삐의 특성을 활용한 일종의 통신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포케베루에도 비슷한 통신 놀이가 있었다. ‘0906’는 ‘늦어(오쿠레루)’라는 뜻, ‘4649’는 ‘잘 부탁해(요로시쿠)’라는 식으로, 숫자의 발음에 착안해 다양한 포케베루용 암호가 유행했다. ‘포케고토바’라고도 불렸던 이 은어 체계는, ‘신주쿠(40109)’나 ‘시부야(428)’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지명은 물론이요, ‘술 한 잔 하자(03215-)’, ‘30분쯤 늦을 듯(80-0906)’, ‘숙취로 고생중(22941)’ 등 젊은이들이 만남을 갖는 데에 필요한 단어를 대다수 포함할 정도였다. 순수한 표음문자인 한글과 달리, 일본어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병용하는 방식이다. 숫자에 복수의 음을 자유롭게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은어 체계와 궁합이 좋다.

포케고토바의 이용이 늘어나면서, 이번에는 아예 입력된 숫자를 자동으로 문자로 전환해서 액정화면에 표시해 주는 기능이 등장했다. 이후 포케베루는 숫자를 주고받는 원시적인 호출기 방식을 탈피해, 문자 전용의 통신기기로 급속도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개인용 통신기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소형 키보드, 일명 ‘포케보드’라는 부속 제품도 등장할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한참 전에 무선통신망을 이용한 인터넷 이용이 정착되었는데, 통신 회사의 말에 따르면 젊은 층의 포케고토바 문화가 90년대부터 휴대폰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을 촉진한 디딤돌이었다.

한편, 한국의 삐삐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삐삐에 음성사서함 서비스가 붙은 것이 돌파구가 되었다. 음성사서함은 호출자가 목소리를 녹음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과 함께, 삐삐의 소유자가 미리 녹음한 인사말을 호출자에게 들려주는 기능을 갖추었다. 이후 삐삐 문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녹음된 음성메시지를 주고받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활기를 띠었다.

연인 사이에 서로 음성사서함의 암호를 공유하고 음성편지를 녹음해서 연담을 주고받는 시간차 커뮤니케이션이 유행했다. 녹음 기능을 이용해 다채로운 삐삐의 인사말이 등장했다. 개성 만점의 소개문을 읊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대중가요를 들려주기도 하고, 직접 부른 자작곡을 발표하는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정기적으로 픽션을 연재하는 ‘삐삐 소설’까지 있었다고 하니, 한국에서는 이 때에 팟캐스트의 원시적인 형태가 싹텄다고도 할 수 있다.

혹자는, 한국과 일본의 통신 회사들의 관찰력과 기민한 대응에 감탄한다. 한국의 통신 회사는 재빠르게 음성사서함을 추가해 숫자만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답답함을 해결했다. 일본의 통신 회사는 숫자/문자 전환 기능을 개발해, 표현의 번거로움을 해소했다. 과연 통신기술 선진국들다운 발빠른 대응력이다.

휴대폰 이전에 무선호출기가 젊은이들의 통신기기로 인기를 끈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 사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과 일본, 그 밖에는 비슷한 시기의 대만과 홍콩 정도이다. 더 나아가 숫자를 이용한 은어가 꽃핀 사례는 한국과 일본 정도가 아닐까 싶다. 글로벌한 관점에서는, 한일간 통신 문화의 근접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사양의 통신 기술이 한국과 일본에서 전혀 이질적인 미디어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삐삐는 목소리나 음악 등 소리를 전달하는 시끌벅적한 구술 미디어로 탈바꿈한 반면, 일본의 포케베루는 문자를 매개하는 과묵한 문자 미디어의 길을 택했다. 미디어 학자 월터 옹은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수천년의 인류 역사는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구술 중심 문화에서 문자 중심 문화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같은 통신 기술이 거의 동일한 시기에 구술 미디어와 문자 미디어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이 상황에 큰 흥미를 갖지 않았을까.

삐삐나 포케베루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지만, 인터넷 이용에서 한국은 구어 중심, 일본은 문자 중심이라는 차이는 유효하다. 사적인 의사 소통에 있어서 카카오톡, 라인 등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선호하는 것은 한일 양국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업무에 관한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연락이 필요할 때에 통화를 선호하는 빈도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높다. 한국에서는 팟캐스트나 유튜브 등 음성이나 동영상을 활용하는 플랫폼이 빠르게 수용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문자나 이미지로 소통하는 소셜 미디어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동영상 서비스에 대한 저항이 의외로 큰 편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한국 사람은 흥이 많아서”라든가 “일본 사람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서”라는 정도의 편견 섞인 속설에 간단히 납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문화적, 사회적, 산업적 요소가 얽혀 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첨단기술이라고 해도, 기술의 문법만으로는 천차만별의 수용 양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문화가 기술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버리는 일은 매우 빈번하다. 동일한 통신 기술에서 시작되었지만 전혀 다른 미디어로 진화한 삐삐와 포케베루처럼 말이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