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1> 산시 ③ 사마천의 고향 한청
사마천만큼 인문학 밥상에 많이 오르는 요리도 없다. ‘사기(史記)’를 인용하거나 언급해 학자 반열에 오른 사람도 꽤 많다. 간언ㆍ궁형ㆍ저술로 이어진 치열한 인생을 평가해 ‘중국 최고 역사가’로 부른다. 2,000년도 넘은 역사책이 입맛대로 번역되고 분석돼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저 놀랍다. 사마천은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230km 떨어진 한청(韩城)에서 태어났다.
시안에서 기차로 3시간이면 한청에 도착한다. 인구 40만명의 완전 시골 역이다. 수나라 시대 598년에 지금의 지명이 됐다. 주나라의 분봉 ‘한국(韩国)’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물론 ‘대한민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분봉은 천자가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마천이 살았을 때는 하양(夏阳)이라 불렀다. 다른 별명도 많지만 하양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택시를 타고 남쪽으로 30분, 사마천 사당 입구다. 멀리서도 그의 조각상이 보인다.
길 양쪽에 ‘사기’의 주인공이 진열돼 있다. 오제본기에 등장하는 황제ㆍ전욱ㆍ제곡ㆍ요ㆍ순이 한 무대에 올랐다. 사기는 본기(本紀)ㆍ표(表)ㆍ서(書)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으로 구분해 총 130편으로 구성된다. 52만자가 넘는다지만 집필 당시와 꼭 같지는 않다. 잃어버린 부분은 다른 책을 참고했고 후학이 보강하기도 했다. 일부 왜곡이 살짝 의심스럽기도 하다. 최근 출토된 유물은 거짓으로 추정되는 내용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명품 저서로서 가치는 변함없다.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기전체,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통사의 효시다. 청나라 건륭제 때 정한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첫 번째로 평가된다.
조각은 대우치수(大禹治水)에서 하(夏)ㆍ은(殷)ㆍ주(周)로 이어지다 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진시황에 도달한다. 길 반대쪽 조각을 보려면 다시 입구까지 다녀와야 한다. 나갈 때 다시 보자. 드넓은 제사광장(祭祀广场)은 오로지 ‘역사학자’ 사마천을 위한 공간이다. 사마천 조각상 뒤쪽 낮은 산에 사당과 무덤이 있다. 도랑을 건너 100m만 걸으면 사당 입구다.
한태사사마천사묘(汉太史司马迁祠墓)라 쓰여 있다. 화려하지 않고 화사한 필체다. 은근하게 매력이 넘친다. 낙관을 살피니 계공(启功)의 작품이다. 계공은 옹정황제 9대손 만주족으로 서예가이자 화가, 홍루몽 연구가로 유명하다. 주로 원로 석학이 임명되는 중앙문사연구관 관장을 역임했다. 사마천은 젊은 시절 낭중 벼슬을 받고 한 무제를 수행해 지방을 여행했다. 아버지 사마염이 죽은 후 문서를 관리하는 관직인 태사령을 이어받는다.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 이후 복권돼 고위관직인 중서령에 오른다. 사마천은 사기 전체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 적었다. 사마염과 사마천의 공저라는 의미다.
길을 따라 올라가 고산앙지(高山仰止)라 쓴 나무 패방을 바라본다. ‘덕망이 높은 사람을 우러러본다’는 뜻, 출처는 ‘시경’이다. 공자를 향한 언급이 사마천에 대한 찬미로 부활했다. 패방을 지나면 선명한 백지에 날렵한 붓칠로 쓴 사필소세(史笔昭世)라 쓴 편액과 만난다. 사마천학회가 그의 탄생 2,140주년을 기념해 증정했다. 서둘러 지고무상(至高無上)을 상징하는 아흔아홉 계단을 오른다.
열전 마지막 제70권은 사마천의 자적적 기록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다. 경목하산지양(耕牧河山之阳) 즉, 경작과 목축을 하며 자랐다고 적었다. 사마천은 10세부터 고문을 읽었다. 주경야독인지는 모르나 독서와 노동을 병행하며 자랐다. 대갓집 아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산지양(河山之陽)은 어떤 수사보다 더 의미있는 편액이다. 무채색 벽돌로 쌓은 문과 잘 어울린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사당 입구다. 태사사(太史祠)는 1886년 청나라 광서제 시대 한청 현령이 쓴 글씨다. 단정하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사마천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헌전(献殿)에 향불이 피었고 기념 비석이 촘촘하게 자리 잡았다. 이어 영원한 안식처를 의미하는 침궁으로 연결된다. 파란 바탕에 금색으로 쓴 사성천추(史聖千秋)가 두공 사이에서 빛을 뿜는다. 전서체 특유의 기품이 드러난다. 천추에 길이 남을 역사가라는 극찬이다. 중국서예가협회의 원로가 썼다. 전서로 쓴 ‘추(龝)’는 이체자인데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와 아주 비슷하다. 열린 문으로 햇볕이 강해 사마천 좌상을 많이 가리고 있다.
사당 뒤에 무덤이 있다. 사망 시기가 다소 애매하다. 바로 무덤을 쓰지 못한 사정이 있을 듯하다. 일가족이 도피 후 고향 부근에 몰래 신위를 봉공하고 의관총을 꾸몄다는 전설이 있다. 약 400년 후, 한나라가 멸망하고 다시 100여년이 흘렀다. 사마씨가 건국한 서진(西晋) 시대에서야 무덤이 만들어졌다. 여러번 수리가 이뤄졌다. 높이 약 3m, 둘레 18m 무덤이 마치 몽골의 게르처럼 생겼다. 쿠빌라이의 칙령으로 보수했기 때문이다. 꽃문양과 함께 팔괘도 새겼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에 사기를 집필한 심정을 토로했다. 결연한 의지와 심오한 사상도 절절하게 기록했다. 흥망성쇠에 대한 통찰과 역사관은 ‘역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팔괘야말로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변화무쌍한 코드다. 1,700여년을 산 측백나무가 팔괘묘 위에서 왕관처럼 펄럭이고 있다.
사당을 나오는 길에 다시 사마천 조각상으로 돌아간다. 본기를 펼친 듯 항우와 유방, 여태후,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 조각상으로 이어진다. 진시황 사후 초나라와 한나라의 패권 전쟁인 초한지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여태후 조각상에 올라가서 놀고 있다. 황제나 장군 조각상은 쉽게 올라갈 수 없다. 한무제 조각상에는 구석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사마천도 보인다. 황제뿐 아니라 조연도 많다. 유방을 도운 공신 장량, 사지가 절단돼 죽은 척부인, 흉노족과 싸운 곽거병, 유학자 동중서도 등장한다. 꽤 많은 인물이 새겨져 있어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사기를 위한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한청고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사마천의 고향답게 현수막도 많이 휘날린다. 명청 시대 거리와 가옥이 풍성하다. 서민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거주 공간이다. 중국의 고성을 참 많이 다녔는데 한청만큼 수더분한 고성은 없다. 8대 고성은 대부분 관광지라서 번잡하다. 한적하다고 해서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청고성 싼먀오(三廟)는 그 어디보다 고품격이다. 게다가 건물과 골목은 옛 모습 그대로다. 거리도 비교적 깨끗해 걸어 다니기에도 좋다.
동쪽에 묘원 셋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공자사당 문묘로 간다. 영성문에서 뒤돌아보면 유리로 만든 다섯 마리 용이 보인다. 만인궁장(万仞宫墙)이라 부른다. ‘인’은 깊이를 재는 단위다. 심오한 공자를 상징한다. 황제의 거처에 구룡벽이 있다면 오룡벽은 공자에 대한 대우다. 극문(戟門)을 지나 대성전에서 공자에게 가볍게 인사한다. 곧바로 존경각(尊經閣)으로 향한다. 명나라 시대 유교 경전 십삼경과 사서인 이십일사(二十一史)를 보관한 도서관이다.
문묘 후문으로 나서면 바로 동영묘(東營廟)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군대 주둔지가 있었다. 군영마다 관우 사당을 설치했다. 지금은 동쪽과 북쪽 사당만 남았다. 입구 현판은 개성묘(開聖廟)다. 관우를 상징하는 충과 의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충의천추(忠義千秋)는 관우에 대한 영원한 찬사다. 부장인 주창과 아들인 관창이 나란히 지키고 있다. 삼공사에는 한날한시에 죽자던 맹세를 이루지 못한 유비ㆍ관우ㆍ장비가 한 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 눈동자가 개성이 강하다. 소설 삼국지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골목 하나 건너면 성황묘(城隍廟)다. 성황신은 성곽과 해자를 관장한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에 대한 기원이다. 당나라 이후 신앙으로 번져 송나라 시대에 제례 행사로 정착했다. 명나라 주원장은 도교와 함께 성황묘에 대한 대중화를 주도했다. 중국 전역에 꽤 많다. 한청의 성황묘도 명나라 시대인 1571년 처음 건립됐다. 입구의 편액 창선단악(彰善瘅恶)은 선행을 표창하고 악행은 증오한다는 뜻이다. 유불선보다 훨씬 권선징악에 직설적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행상이 물건을 파는 장소인 정교방(政教坊)이 있다. 성황묘는 늘 개방되는 광장이었다. 백성에게 개방돼 언제라도 기도가 필요하면 광천전(廣薦殿)에서 제사를 올리면 된다. 보다 공식적인 제사는 덕형전(德馨殿)에서 치뤄진다. 현령과 사대부가 참배하는 공간이다.
덕형전 양쪽 벽화가 흥미롭다. 붓과 명부를 손에 든 상선사(賞善司)는 선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적절한 판결을 내린다. 심판사(審判司)는 선한 자의 생명을 연장해주고 악한 자의 생명을 앗아간다. 검찰사(檢察司)는 선한 자를 위해 좋은 일을 준비하고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내린다. 벌악사(罰惡司)는 선악을 명확히 구분해 악당 모두를 처리한다. 선과 악을 기준으로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4대 판관이다. 물론 저승에 산다. 생전에 착하게 살라는 교훈이다.
고성을 구석구석 보려고 반나절을 돌아다녔다. 새로 개발하는 모습도 곳곳에 보인다.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골목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차량 진입을 막고 주민을 위해 전동차를 운영한다. 양념과 반찬을 파는 가게도 많다. 무료 식수를 공급하기도 한다. 아이들 그림을 벽에 전시하고 있다. 서민의 공간답다. 옛날 대갓집도 있지만 허름한 집도 많다. 문은 열려 있고 누가 들여다봐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사람 사는 맛이 나는 동네다.
고성 남문으로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다음 행선지를 알고나 있다는 듯 틈왕행궁(闯王行宫)이 느닷없이 등장한다. 틈왕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이다. 1644년 시안에서 대순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다.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 시안에서 한청을 거쳐 황하를 건넜다. 틈왕행궁은 이때 머물던 장소다. 이자성은 숭정제 연호를 새겨놓은 한청고성의 서문 편액을 끌어내렸다. 숭정제 연호를 긁어내고 ‘대순영창원년(大顺永昌元年)’이라 새겼다. 약 50일 후 명나라는 멸망했다. 틈왕 연호를 석각한 유일무이한 국가 1급 보물은 현재 중국국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수도에서 쫓겨 퇴각할 때도 머물렀다. 틈왕행궁은 현재 위생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금연 광고 및 광견병 주의사항, 당 선전물이 적혀 있고 흡연실 표시도 있다. 마당에 비석이 하나 있다. 틈왕행궁이라 적고 뒤에는 깨알처럼 안내문이 있다. 1961년 2월 전 문화부 부장(장관) 전한(田汉)이 한청에 왔다. 전한이 누군가. 중국 국가의 가사를 쓴 사람이다. 한청에 있는 혁명열사능원을 참배하고 틈왕행궁을 찾았다. 4행 7언 율시를 남겼다. 한청 대신에 ‘하양’을 언급했다.
밥과 국을 준비해 열렬히 틈왕을 환영했네! (箪食壶浆迎闯王)
민란군이 여기로부터 황하를 건넜네! (义军从此渡河梁)
영웅의 업적은 티끌로 사라졌어도 (英雄事业半尘土)
여전히 행궁이 남아 하양을 웅변하네! (犹有行宫壮夏阳)
본인의 졸고 ‘민,란’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오쩌둥 정부는 이자성을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자성이 펼친 경제개혁에 주목했다. 장제스 정부의 반농민적인 토지정책을 비판하는 칼날로 사용했다. 어쩌면 이자성은 사마천의 ‘사기’ 정신을 잘 구현한 인물일지 모른다. 부패한 왕조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그의 역사관과 ‘사기’는 일맥상통하다. 전한은 당연히 사마천 사당과 무덤도 예방했다. 역시 시 한 수를 읊었다. 마지막 행은 찬양 그 자체다.
“위대한 업적은 천년만년 지나도 불멸이어라! (鸿业千秋总不磨)”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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