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터에 기자 이름·소속과 질문 요지 떠있어” 각본설 차단
기자들 소품 활용 거의 안해… 예년보다 차분한 분위기 진행
“전직 대통령들의 뒷모습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본인은 어떤 모습이 될 것 같은가.”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황할 법한 질문이 나왔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하하” 큰 소리로 웃어넘겼다. 이어 “대통령 이후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 때 전력을 다하고, 끝난 뒤엔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솔직히 구체적인 생각을 별로 안 해봤다. 좋지 않은 모습, 이런 건 아마 없을 것이다”라는 대목에선 좌중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칫 가라앉을 뻔 했던 분위기는 문 대통령의 농담 섞인 답변으로 오히려 살아났다.
문 대통령이 분위기를 띄우는 모습은 여러 번 포착됐다. 문 대통령은 첫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정면의 프롬프터(자막 등이 나오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모니터가 2대 있다. 질문하신 기자님 성명과 소속, 질문 요지가 떠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답변이 올라와있는 것 아니냐’ (의혹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미리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이면서다.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제기되는 ‘질문 사전 협의설’ ‘각본설’을 문 대통령이 ‘선제 차단’하자 장내엔 다시 웃음이 터졌다.
문 대통령은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인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취지의 한 지역신문 기자의 질문을 받고 “설악산 케이블카나 곤돌라 문제를 말씀하시지 않고, 일반적인 문제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예년보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문 대통령이 직접 질문자를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된 세 번째 기자회견이라, 문 대통령은 물론 참석 기자들도 어느 정도 형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질문과 답변의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했다”고 소개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지목을 받기 위해 기자들이 사용하던 소품도 상당 부분 자취를 감췄다. 2018년 기자회견 때는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 등 인형이 등장해 화제가 됐다. 한 기자는 지난해처럼 한복 차림에 부채를 들고 참석했지만, 질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치열한 질문 경쟁에 난처한 듯 “제가 마음이 약해서요”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당초 90분으로 예정됐던 이날 회견은 100분을 훌쩍 넘겨 진행됐다. 사회를 맡은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90분을 넘겼다’고 안내한 이후에도 문 대통령은 2명의 추가 질문을 더 받았다.
회견에 앞서 영빈관에는 트로트 가수 ‘유산슬’(방송인 유재석)의 ‘사랑의 재개발’이 흘러나와 이목을 끌었다. 고 대변인은 “배경음악을 통해서도 ‘확실한 변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퇴장할 땐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갈 길은 아직 머니까’라는 가사가 담긴 이적의 ‘같이 걸을까’가 울려 퍼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처럼 앞 열에 자리한 일부 기자들과 악수를 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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