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과 진중권, 두 대표 논객이 새해 첫날부터 날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조국 정국 등 검찰 수사와 검찰 개혁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다. 두 사람은 JTBC의 신년 토론회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에서도 맞붙었는데, 이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 준다고.
유시민은 자신을 ‘뚜렷한 정치적 편향’을 가진 ‘어용 지식인’이라고 말한다. 솔직한 건 좋지만, 알릴레오를 시작하며 ‘혹세무민하는 보도를 정리하겠다’고 나섰던 이가 정치적 편향을 솔직히 드러내는 게 마냥 괜찮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물며 유시민은 110만 구독자를 가진, 혼자서도 언론 수준 영향력을 가진 스피커 아닌가.
반면 진중권은 스스로를 공평무사한 ‘심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문제를 선악의 구도에 가두는 건 똑같다. 친문의 권력 누수를 비판하느라, 거기 칼을 들이댄 검찰은 철저한 정의로 포장한다. 심판을 자임하던 그는 ‘문빠’를 지목해 공개토론을 제안하고, 자신의 제안을 받지 않으면 ‘찌질한’ 것이라 공격한다. 그에게 논쟁은 승자가 패자를 처형하는 콜로세움 위의 전투일 뿐이다.
청와대에서 권력의 누수가 일어나고 있고, 윤석열의 검찰은 권력에 칼을 겨눴다.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조국 정국을 정말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태를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건 그 안에 수많은 디테일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표창장 수사다. 범죄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고, 검찰 개혁을 주장한 법무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당일 소환도 없이 기소했다. 그렇게 무리수를 동원했음에도 공소장은 엉터리였고, 결국 두 번 기소하는 몽니를 부렸다.
세상만사를 선악으로만 나누기는 힘든 법이다. 검찰 개혁만 해도 그렇다. 공수처는 옥상옥으로 볼 수도 있지만,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도구로 볼 수도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최상의 결과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검경의 의견을 반영하고 여야의 합의까지 거쳐서 만들어진 안이 한 사람의 정의관에 완전히 부합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의와 불의가 딱 부러지게 나누어지는 일은 오히려 드물고, 시비는 보통 뒤섞여 있다.
이처럼 복잡한 문제에서 논쟁에서 이기는 쉬운 방법은 오히려 편향에 편승하는 것이다. 유리한 정황을 취사선택하고 그 위에서만 싸우는 것이다. 청와대의 권력 누수를 지적하면 ‘검찰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지적하면 ‘이 정부의 비리 의혹은 수사하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 옛 논객들이 남의 편향을 탓하면서도 스스로의 편향은 숨기지 않는 건 흥미롭다. 그들은 오히려 더 선명한 선악 구도를 세우고, 악에 빠진 대중을 계몽하는 선지자 노릇을 하려 한다.
이들은 ‘지식인’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사실 글 쓰는 사람이라고 딱히 잘난 건 없다. 그 정도 글에 필요한 지식과 견문은 대학과 현업에서 넘치게 익힐 수 있다. 통찰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대단한 차이는 아니다. 교수로서, 혹 국회의원에 장관으로서 깊은 식견을 갖췄음은 당연하겠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모든 일에 전문가마냥 행세할 순 없다.
어쩌면 논객들이 대중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만사에 기웃댈 만큼의 잉여시간, 내 유리한 대로 말싸움을 이끌어 내는 말본새 정도일지도 모른다.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 갈등에, 새천년쯤 활동하던 그 논객들이 여전히 말길을 독점하고 잡음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는 것이 무슨 유익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근거는 자의적이며, 진실도 담보하지 않고, 숙의와도 거리가 먼 단순한 말싸움일 뿐이다. 그러니 보통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고, 의미 없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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