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30> 서울 대조동 불광대장간
진지한 작업에 싸구려 농담은 낄 틈이 없었다. 서울 대조동에서 ‘불광대장간’을 운영하는 박경원(사진 왼쪽)씨가 불에 달군 쇠를 잡고, 그의 아들인 박상범씨가 망치로 내려치며 쇠를 단련하고 있다. 캠핑족이 찾는 손도기에 쓰일 도끼 날이었다. 왕태석 선임기자

“땅, 땅….”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공기를 쨍하고 깰 기세였다. 사내가 모루(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도끼날을 쇠메(큰 망치)로 내려치던 참이었다. 모루 주위엔 순식간에 작은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그가 체중을 실어 내려친 망치가 쇳덩이에 정확히 떨어져 튄 불꽃이었다. 도끼날은 가마에서 900도가 넘는 불에 달궈져 이글거렸다. 맞은편 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가마에서 불로 불린 쇠를 다시 모루 위에 올려놨다. 두 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이 쇠로 주고받는 일이 조건반사처럼 몸에 밴 듯 보였다.

◇서울서 재현된 김홍도 ‘대장간’

TV의 그 흔한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보여 준 옛 대장간 풍경이 아니다. 지난 9일 오전 10시 서울 은평구 대조동. 박경원(82)씨와 박상범(51)씨는 ‘불광대장간’에서 캠핑족이 즐겨 쓴다는 손도끼의 날을 벼렸다. 쇠메로 불에 달군 쇠를 두들기며 모양을 잡는 단조 작업이었다.

“때리면 때릴수록 (쇠)조직이 치밀해지거든요.” 상범씨가 큰 망치를 내려놓고 “아이고”라고 가쁜 숨을 돌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아버지 박씨는 쇠를 잡는 대장, 아들 상범씨는 쇠를 내려치는 야장으로 쇠를 부렸다. 21세기 그것도 서울에서 대장간이라니…. 시간이 거꾸로 흘러 김홍도의 풍속화 ‘대장간’ 속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서울미래유산 불광대장간 - 송정근기자/

13㎡ 남짓의 대장간은 역사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1963년 문을 연 이곳엔 반세기 가까이 된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큰 배에서 가져왔다는 모루는 대장간에 자리를 튼 지 45년이 됐다. 박씨는 70년 전 처음 망치를 잡았다. 6ㆍ25전쟁으로 고향인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으로 피란을 와 대장간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박씨의 나이 열두 살 때 일이다. “미국 사람들이 배급을 줬는데 어떨 땐 안 나왔으니까. 그런데 그때 국민(초등)학교 옆에 대장간이 있었고, 가서 일하면 오후 5시쯤 국수를 줬어. 그거 얻어 먹으려고 가서 일을 배웠지, 하하하.”

박씨에게 메질은 절박한 밥벌이의 수단이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거리로 나갔다. 리어카에 화덕을 넣어 끌고 다니며 칼과 곡괭이를 만들었다. 대장간 차릴 돈이 없어 만든 ‘이동형 대장간’이었다고 한다.

박씨 부자 머리 위에 걸린 연탄 집게는 요즘도 팔린다고 한다. 박씨 부자가 오른 손에 들고 있는 도구도 모두 직접 박씨가 만들었다. 낫부터 망치까지. 광산 같은 대장간엔 도시를 지탱한 삶의 도구들이 가득하다. 왕태석 선임기자
◇리어카에 화덕 넣고 다니며….

쇳소리가 늘수록 박씨의 삶에도 ‘살’이 붙었다. 7~8년을 거리의 대장장이로 산 그는 돈을 모아 1963년 불광국민학교 인근에 처음으로 대장간을 차렸다. 10년 뒤 대조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계속 ‘불광대장간’이란 간판을 건 이유다.

박씨는 모든 장비를 손수 만들어 쓴다. 그의 야무진 손끝에 손님이 몰렸다. 특히 석공이나 목공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도구 전문가’들이 알아봤다는 것은 박씨의 작업이 그만큼 빈틈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대장간엔 볕이 들었다. 도시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공구 수요가 부쩍 는 시대적 분위기도 큰 몫을 했다. “하루에 쌀 한 가마 살 돈을 벌었어. 그때가 좋았지. 90년대까지도 (벌이가) 괜찮았고.” 박씨의 말을 듣고 대장간을 둘러보니 벽엔 ‘031-825-0***’ ‘이영춘2’ 등의 주문자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울 외곽손님은 물론, 단골들이 대장간을 거쳐 간 흔적이다. 상범씨는 “제주에서도 주문이 온다”라며 웃었다.

“예전엔 대장간 일로 집도 샀는데, 이젠 힘드니까….” 70년 동안 망치를 들고 산 박경원씨는 대장간의 맥이 끊길까 걱정이다. 왕태석 선임기자
◇부자가 27년 함께 지킨 대장간

영광의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공장에서 만든 값싼 연장들이 쏟아지면서 대장간에도 찬바람이 들었다. 박씨와 함께 7년 동안 화덕 옆에서 대장간을 지켰던 박 씨 아내의 몸에도 탈이 났다.

결국 아들인 상범씨가 대장간에 뛰어들었다. 1993년, 그가 군에서 제대한 해였다. 다행히 상범씨에겐 어려서 대장간 가는 길이 소풍 같았다고 한다. “대장간에 가면 아버지가 자장면이나 갈비를 사줘”서였다. “군에 있을 때도 휴가 나와서 대장간 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힘에 부쳐 해 제가 일을 이어받았죠. 처음엔 일이 고돼 저도 앓았죠. 평일엔 약속도 안 잡고요.” 상범씨의 허락을 받고 메질을 해보니 손목이 시큰했다. 위험하고 고된 일, 다친 적은 없을까. “기술자는 안 다쳐.” 박씨의 말은 단호하고, 단단했다.

박씨 부자는 27년을 대장간에서 함께 일했다. 부자가 크게 다퉈 한 명이라도 대장간 일에 손을 놓은 적은 없단다. 대장간은 대장과 야장이 짝을 지어 일해야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다. 성격이 180도 달랐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보며 서로 빈 곳을 채웠다. “처음엔 아버지가 제 일하는 방식을 못마땅해했어요. 옛날엔 다들 전문가였지만, 요즘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연장이 만들어졌고 쓰면 되는지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 손님 오면 잡고 있으니 ‘일은 언제 하냐’며 핀잔을 주셨죠. 이젠 그걸 이해하시죠.” 그렇게 부자는 서로를 단련하고 있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서울미래유산 불광대장간 - 송정근기자/

꺼져 가는 대장간의 불씨를 되살린 건 장인정신이다. 박씨 부자는 대장간에서 파는 모든 도구에 ‘불광’이란 문구를 새겨 넣는다. 무쇠처럼 단단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두 대장장이는 아침엔 단조 일을, 오후엔 담금질을 해 가며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낫과 호미를 만든다. 기계를 쓰지 않고 모든 작업을 손으로만 하는 대장간은 수도권에선 불광대장간이 유일하다고 한다.

수작업으로 과거를 지키는 일은 오랜 시간과 공이 필요했다. 석공들이 쓰는 망치에 쓰는 묵직한 쇳덩이 20개를 가마에 넣고 망치로 이리저리 모양을 다듬는 데만 1시간 30분이 훌쩍 넘게 걸렸다. 몇 시간씩 두들기고 담금질한 연장은 기계로 찍어낸 것보다 수명도 길다.

그래서 그 유명한 ‘독일제 쌍둥이 칼’보다 ‘메이드 인 불광’이 어떤 주부들 사이에선 명품으로 통한다. 이날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온 조민숙(57)씨는 “손에도 잘 익고 날이 잘 무르지 않아 여기 칼을 쓴다”고 말했다. 조씨는 3만원짜리 부엌칼을 사 갔다. 크기나 모양이 다 각각이라 골라 쓰는 재미를 주는 것도 대장간 제품의 미덕이다.

2대가 함께 운영하는 ‘불광대장간’은 요즘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추억을 선사한 덕이다. 왕태석 선임기자
◇ “대장간 지키는 건 도를 닦는 일” 스님의 말

박씨의 대장간이 처음 자리 잡은 불광(佛光)동은 주위에 크고 작은 절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 지어진 이름이다. 이 동네에서 박씨 부자는 허물어져 가는 다른 대장간을 바라보며 계속 불광(火光)을 냈다. 그런 대장장이에게 일은 때론 수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성광씨의 말이다. “가끔 스님이 오세요. 산에서 텃밭도 가꾸고 겨울에 나무도 패니까 대장간 연장이 필요하신 거죠. 어떤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대장간 일을 하는 게 도를 닦는 일이라고요. 힘든 일을 반복해서 꾸준히 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듣곤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대장간 안의 벽은 곳곳에 금이 갔다. 풍화된 외벽 칠은 비늘처럼 일었다. 부자는 이곳에서 대를 이어 49년 동안 가마의 불을 꺼트리지 않았다.

대장간의 ‘손맛’은 아직 유효하다. 나들이하기 좋은 봄이 되면 땔감용 나뭇가지를 채취할 때 쓰는 나대 등 캠핑용 장비를, 김장철인 가을이 되면 부엌칼 등 생활용품을 사려는 손님들이 몰린다. 고단하고 길었던 대장장이로서의 외길 인생, 부자는 더 먼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 대장간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여든 넘으니 몸이 안 좋긴 해. 그래도 힘이 될 때까진 나와야지.”(박씨) “아들이 대학생이에요. 원한다면 물려주고 싶어요. 나이 오십 넘으면 ‘명퇴(명예퇴직)’ 걱정해야 하잖아요. 기술이 최고라니까요.”(상범씨)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