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발전 이끈 사회보험, 복지제도 중추로
노동 분화와 AI 기술로 지속가능성 위협
특수고용자 가입의무화 등 보완책 시급
성장과 파이 키우기가 지상 과제였던 한국 사회에 균형 발전과 분배를 담보하는 사회보험의 도입과 안착은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군사정권 시절, 사회보험 이야기를 꺼내려는 이들은 ‘사회’라는 말만 들어가도 경기를 일으키는 실세들의 몰이해에 좌절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 당시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사회보험 도입의 필요성을 에둘러 표현하며 ‘사회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당시 한 경제부처 장관은 ‘혹시 당신 측근에 빨갱이가 있어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니냐’고 쏘아붙여 정 장관을 침묵에 빠뜨렸다.
사회보험을 백안시하던 군인 정치인들의 시각은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유럽순방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이 평일에도 해수욕을 즐기는 스페인의 피서객을 보고 “유럽의 부자들이냐”고 묻자, 측근들이 “실업급여를 받는 독일의 실업자”라고 답했고 그러자 전 대통령이 “실업보험제라는 게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니 결코 도입해서는 안 되는 제도”라고 생각해 집권층에 이런 생각이 퍼졌다고 한다. 국민들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오랫동안 정부 내 논의가 무르익은 국민연금 도입을 위해 설득차 노총을 찾아갔던 이종윤 전 보건사회부 차관은 “자식이 노후를 보장해 주지, 정부가 뭘 책임진다는 것이냐”라는 험악한 노총 인사들의 반응을 맞닥뜨렸다고 회고한다. (‘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ㆍ2019).
우여곡절 끝에 착근한 사회보험제도(산재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는 한국 사회복지 제도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됐지만, 시대 변화 앞에서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노동시장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화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가입률 격차(정규직 85.0%, 비정규직 36.5%ㆍ국민연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여기에 플랫폼 노동과 프리랜서의 확산 등 고용 형태 유연화, 인공지능(AI)의 발전과 로봇 개발 등은 그렇지 않아도 넓은 사각지대를 더 성글게 할 공산이 크다. 출산율 하락에 따른 노동 인구의 감소, 급격한 고령화도 사회보험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최근 공개된 국회입법조사처의 한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사회보험이 크게 약화된 가까운 미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전망한다. AI, 로봇 등 신기술로 일자리가 대체될 경우 실업에 따른 사회보험탈락자(지역가입자로의 전환)를 추계한 결과, 2025년까지 5%만 직무 대체가 이뤄져도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상실할 근로자가 각각 44만명과 47만명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가장 보수적 전망치로 실제 2025년 근로자들의 평균 직무능력 대체율은 71%로 점쳐진다. 특히 농림어업종사자, 단순노무자들의 직무능력 대체율은 90%에 육박했는데 이는 저임금노동자, 취약계층일수록 앞으로 점점 더 사회보험의 보호를 받기 어려워질 것이란 얘기다. 국회입법조사처 관계자는 통화에서 “직무능력 대체율을 조금만 더 현실적으로 가정해도 엄청난 (사회보험)탈락자가 나오더라. 공개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털어놨다.
사정은 급박하지만 보완책과 대안을 마련해야 할 정치권은 천하태평이다. 보험설계사ㆍ택배기사와 같은 특고노동자의 산재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법안은 18대 국회, 19대 국회에서 입법이 무산된 데 이어 이번 국회에서도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조차 못됐다. 9년 전 극심한 생활고로 숨진 영화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의 죽음을 계기로 발의된 예술인과 특고노동자의 고용보험 의무가입 법안도 발의 1년이 지나도록 상임위에서 논의 한 번 안됐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층이나 실직자가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 사회보장제도인 한국형 실업부조제도(국민취업제도) 제정 법안도 지난해 11월 상임위 전체회의에 상정된 뒤 감감무소식이다. 정쟁과 대립으로 점수를 잃었던 20대 국회가 이를 만회할 기회는 아직도 넉 달이나 남아 있다.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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