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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다, 경제를 읽다] 경제버블 ‘카오스 이론’처럼… 물감 뿌리고 흘린 폴록

입력
2020.01.11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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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과 나비효과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잭슨 폴록, ‘넘버 5(No. 5)’(1948), 개인 소장, 244×122㎝
잭슨 폴록, ‘넘버 5(No. 5)’(1948), 개인 소장, 244×122㎝

지난 연말 뉴욕을 방문할 기회에 뮤지엄오브모던아트(MoMA)가 새롭게 증축했다고 해서 다시 가보았다. 서쪽 측면의 공간을 늘려 전시 보기가 더 여유로워진 이 미술관은 3층 한편에 액션페인팅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 공간의 주인공은 단연 잭슨 폴록(Jackson Pollockㆍ1912-56)이다.

2000년대 초반에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가 출시되었다. 이 영화는 195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미술사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젊은 여성 캐서린 왓슨(줄리아 로버츠 분)이 동부의 전통 있는 여자대학인 웰즐리(Wellesley) 칼리지에 교수로 부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유롭고 열린 사고로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캐서린은 첫 시간부터 전통적인 강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학생들의 고정관념과 반발로 인해서 큰 장벽에 부딪힌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한 장면은 그녀가 학생들에게 폴록의 추상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형화된 미술양식에만 익숙해 있던 학생들에게 현대 미술의 예술성과 가치를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들이붓고

2006년 11월 뉴욕타임스는 잭슨 폴록이 1948년에 제작한, 마치 컬러 스파게티를 헝클어 놓은 듯한 작품인 ‘넘버 5(No. 5)’가 멕시코의 금융인 데이비드 마르티네즈에게 1억4,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1,315억원)에 팔렸다고 보도했다. 이 뉴스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해 6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이 로더 화장품 회사의 상속인 로널드 로더에게 1억3,500만달러라는 당시 최고가에 팔린 바 있는데, 이 기록을 불과 몇 개월 만에 갱신했기 때문이다.

폴록은 1930년 가을 뉴욕에 왔으나 그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알코올중독 치료뿐 아니라 정신질환 치료도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행운을 선사한 사람은 바로 1942년 뉴욕에 화랑을 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이었다. 그녀가 기회를 제공해준 덕에 폴록은 1943년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이 전시회가 뉴욕의 유명 잡지들에 일제히 보도되면서 스타 탄생은 단번에 이뤄졌다.

폴록의 작업방식은 마룻바닥에 펼쳐놓은 캔버스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물감을 뿌리고 떨어뜨리며(drip-and-pour) 그리는 스타일이다. 그는 실제로 물감을 담은 통을 손에 들거나 옆구리에 낀 채 작업을 했다. 흥에 겨우면 물감을 통째로 들이붓기도 했다. 그에게 붓은 ‘물감을 칠하는 도구’가 아니라 차라리 ‘물감을 운반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폴록이 개발한, 붓으로 그리는 대신 뿌리고 흘리고 쏟아붓는 드리핑(dripping) 기법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대표적 전위미술 형식인 추상표현주의의 주요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넘버 5’ 역시 드리핑 기법의 소산이다. 이러한 폴록의 작업방식은 미술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가 명명한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란 용어로 더욱 유명해졌다.

◇캔버스에 표현된 카오스

폴록 이전에 최고가를 기록했던 피카소나 클림트의 작품들은 분명 많은 시간을 요하는 그림들이었다. 반면 폴록의 스파게티 그림(?)은 어쩌면 하룻밤에도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림 제작에 투입한 노동시간 대비 작품 가격을 따져본다면 폴록의 경제적 효율성(노동시간당 수입)은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액션페인팅에서는 작업 결과물 못지않게 작업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작업과정 자체가 완성된 작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액션페인팅은 작품의 제작과정이 곧 작품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작품 자체가 화가 움직임의 기록인 것이다. 실제 폴록은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캔버스에 어떤 행위를 가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의 그림은 즉흥적으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뿌리고 흘렸을 때 생기는 우연의 효과를 적극 이용한 것이다.

드리핑 기법의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예술적 효과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캔버스에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비효과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 MIT대학의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aurentz)이다. 수학자이자 기상학자였던 그는 ‘현대과학이 일월식 같은 천체 운동, 로켓 운동 등은 정확하게 예측하면서도 왜 유독 날씨는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날씨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기상예측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초기 조건 값을 1,000분의 1씩 다르게 주었더니 결과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로렌츠가 이를 토대로 1972년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나비효과란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는 자연현상의 결과는 초기 조건에 지극히 민감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즉 어떤 결과도 처음엔 감지조차 되지 않은 작은 변화에서 비롯한다는 것인데, 이 원리는 카오스이론(Chaos Theory)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서 나비효과는 더욱 강한 힘을 갖는다. 디지털과 매스컴 혁명으로 정보의 흐름이 매우 빨라지면서 지구촌 한구석의 미세한 변화가 순식간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접하는 현상들은 거의 모두가 카오스 현상이다. 시냇물의 흐름, 바람,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물, 주가지수의 오르내림, 그리고 변덕스러운 연인의 마음…. 이런 복잡한 자연계 및 사회적 관계의 전체적인 현상들을 해석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다.

경제현상을 분석할 때 일반적으로 경제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기업의 생산결정이나 소비자들의 구매계획, 경기예측, 시장분석 등을 연구할 때 경제학자들은 보통 경기가 침체되어 바닥에 다다르게 되면 다시 반등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믿음과는 달리 시스템이 균형상태에서 이탈하여 예측할 수 없는 양상으로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 주가 폭락, 환율 급등, 부동산경기 버블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마치 임의적 운동(random walk)처럼 변화 양상을 파악하거나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카오스이론의 적용이 필수적이다.

◇짧게 끝난 전위예술가의 삶

폴록의 작업은 어떠한 계획이나 의도 없이 즉흥적인 행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드리핑 기법에 의한 감정의 표현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전혀 예측하지 않은 채 작업을 하였다. 그림의 기본 주제나 제목을 미리 생각해 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번듯한 제목 대신 ‘넘버 1’ ‘넘버 7’ 등 숫자를 붙여 단지 작품을 구분했을 뿐이다.

폴록이 의도했든지 아니든지 간에 전통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회화의 이념, 그러니까 회화란 사물에 대한 모사(模寫)라는 고대 그리스적인 고정관념이 그에 의해서 무너졌다. 회화가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관습이 깨진 것도 물론이다. 폴록의 중요성은 화가와 캔버스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액션페인팅에서는 붓보다 붓을 쥔 몸의 움직임이 중요하며, 화가는 몸 전체로 캔버스와 대면하는 것이다.

폴록은 이처럼 새로운 추상회화의 기법을 현대미술에 도입하였다. 이러한 기법이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서 작업과정을 중시하는 퍼포먼스 예술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존재는 현대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잭슨 폴록의 전기 영화는 ‘폴록(Pollock)’이란 제목으로 출시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에드 해리스(Ed Harris)가 폴록 역을 맡은 이 영화는 예술가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순탄치 못했던 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그는 알코올중독과 정신질환, 동성애 등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고, 결국 1956년 음주상태에서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맞은 차량 전복 사고로 44세의 나이에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였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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