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은 농경지대 아닌 ‘농목혁명’에서 싹 틔워

역사가 언제나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승리자, 주류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기억돼 온 탓이다. 신뢰할 만한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의 서술이 필요하다. ‘신세계사’는 그 이름처럼 이미 알고 있던 세계사의 통념을 제대로 뒤집어 보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책이다.
저자는 중국 태생의 역사학자 쑨룽지(孫隆基)다. 그의 삶은 경계를 넘나든다. 중국 충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라고 대학은 대만에서 나왔다. 미국 유학 중에는 러시아사와 동아시아사를 공부해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렇게 여러 지역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덕분에 서구 중심주의적 사관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모두 3권으로 기획된 책은 1권이 먼저 나왔다. 선사시대부터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의 죽음까지 16개 챕터로 나눠 숨가쁘게 역사의 변화를 훑는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서사시다.
책은 이미 알고 있던 역사적 지식을 판판이 깨부순다. 가장 흥미로운 건 고대 문명 발상지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건 이랬다.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 황하 문명 등이며, 이 문명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 황허(黃河) 등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하며 농업과 도시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신세계사는 이 같은 대하유역(大河流域)설을 틀린 이야기라고 한다. 쑨룽지는 비옥한 토지가 있는 큰 강 주변 농경지대에서만 문명의 싹을 틔웠다는 기존 주장에 대해 “깊이가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학설”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오히려 농경보다는, 유목ㆍ방목지대에서 발달한 목축이 인류 문명 발달에 더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래서 ‘농업혁명’ 대신 농경목축혁명, 즉 ‘농목혁명’이란 말을 쓴다.
그는 농목혁명론을 토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만 해도 애초 해발고도가 꽤 높은 메소포타미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측면 부분에서 문명이 먼저 발생했을 것이라는, 이른바 ‘산측설’을 제시한다. 환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큰 강가로 가 닿으면서 관개농업, 도시혁명 등으로 상징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현재 고고학계, 역사학계에선 ‘4대 고대문명 발상지’는 이제 낡은 개념이다. 고대 문명 발상지가 최소 20여곳 이상이라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 출신인 저자가 이 논리를 황허에다가도 적용할까. 저자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는 중국이 황허 같은 단 한 지역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한족 민족주의도 경계한다. 동북공정에서부터 일대일로(一帶一路)까지 중국 역사에 뿌리 깊게 박힌 중원주의도 부정한다. 책 서문에다 “서양 중심론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동아시아 중심론을 채워 넣으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단위 사관을 넘어 글로벌 사관으로 가려는 게 목표”라고 밝힌 저자답다.
번역을 맡은 이유진 연세대 중국연구원 연구교수는 “쑨룽지는 중국의 문명도 하나의 강이 아니라 다양한 강에서 비롯됐으며, 그 어디에도 중심은 없다고 말한다”며 “중국이 택한 ‘다원일체론’이니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서구 중심주의적 역사관 극복은 책 전체를 지배한다. 쑨룽지는 예수를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인식은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신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히브리의 예언운동, 인도의 불교, 자이나교, 중국 제자백가의 등장을 한데 묶어 입체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세계적 종교와 보편 사상의 발생이 어느 한 지역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을 짚어 주기 위해서다. 미개하다고 치부됐던 오세아니아 지역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도 문명을 소개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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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사 1
쑨룽지 지음ㆍ이유진 옮김
흐름출판 발행ㆍ632쪽ㆍ4만2,000원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문명은 어느 한 곳 발상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 그러니 어느 문명이 다른 문명에 비해 더 탁월하다거나 우월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역사는 단지 새로움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워낙 전문적이고 방대한 내용 탓인지 책은 단숨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 2권과 3권에선 보다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한 보다 친절한 설명으로 현기증을 줄여 주기를 기대해 본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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