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원도 산골에서 연수회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아침 해가 다른 곳보다 늦게 떠올랐고 그래서 아침 식사 중에 해맞이를 하였지요. 해가 뜰 때의 저는 가끔 태양 숭배자인 양, 해를 경건하게 맞이하곤 하였고, 그날도 저는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는데 제 맞은편에 앉은 분이 제가 눈부셔할까봐 배려 차원에서 커튼을 치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맙지만 커튼을 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아침 해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을 그분과 나눴습니다. 같은 해이지만 아침에 얼굴을 처음 내미는 해가 제게는 희망의 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루의 해도 하루를 열며 솟아오르면 희망의 해가 된다면 한 해를 처음 열며 솟아오르는 해는 더더욱 희망의 해가 되겠지요? 그래서 새해를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해맞이를 하러 해맞이 명소를 찾아가는 것일 거고요.
그래서 올해도 많은 사람이 해맞이 명소에 갔는데 아까운 돈과 시간을 그런 데 그렇게 극성스럽게 쓸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고 시간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일 것입니다. 왜냐면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찾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어지는 희망은 완전치 않을뿐더러 나의 희망이 아닙니다. 어떤 희망이 나의 희망이려면 그 희망은 누구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막말로 누가 희망을 가지라 강요한다고 우리에게 없는 희망이 생기겠습니까? 모든 상황이 장밋빛이기에 희망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희망 의지와 믿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거지요.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나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희망 의지를 지닐 것이고, 그 희망이 단지 의지일 뿐 가능성이 없이 허황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요. 이것을 달리 말하면 희망 의지는 나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요, 믿음은 나 아닌 누군가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해 해맞이를 위해 굳이 달려감은 이런 적극적인 희망 의지와 믿음의 표현인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새로운 희망에 대한 희망의 표시일 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새해 희망이 올해도 작년처럼 가족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희망하는 그런 거라면 그것은 여행 삼아 정동진에 가서 해 돋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다가 곁들여 소원을 비는 것으로 대체하면 될 것입니다. 새해 희망은 새로운 희망이어야 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희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 다 팽개치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새해가 되었는데도 또 작년처럼, 아니 지난 십수 년을 산 것처럼 살아야 된다는 말인가. 하고 자신을 질책하며 발전 없는 안정에의 안주를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실 안정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불안 심리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해 새로운 희망을 가지려면 불안정을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렇다면 불행치 않음이 행복이라고 착각하지도, 불행치 않음에 안주하지도, 안정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치 않음에 안주하려다 시간이 지나 불행해지는 불행을 피하려면 새해에는 적극적으로 살기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기로 행복의 방향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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