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없는 영국은 영국이 아니다. 눈길 가는 곳마다 꽃이 있고 많아도 아주 많다. 그런데도 영국 사람들은 꽃구경을 하려고 palace(궁), castle(성), manor(영주의 저택)에 간다. 새가 날아들고 벌이 붕붕거리는 정원에 차를 마시러 간다. 나가면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데도 집에도 꽃을 두고 산다. 거실과 식탁에 꽃을 꽂아 손님을 맞고, 손님은 꽃을 들고 방문한다. 영국 사람들은 소극적이고 공손하며 손짓과 몸짓이 적으므로 꽃으로 대신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생필품이라 꽃은 마트에서도 파는데, “금방 시들어서 이내 버릴 것을 돈을 주고 사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며 산다.
어두컴컴하고 낡은 거리가 아름다운 것은 꽃바구니(hanging basket) 덕분이다. 큰 공 모양의 꽃다발이 길 따라 높다랗게 걸려있고, 갖가지 종류와 색깔의 꽃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한 영국 사람들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말을 건넬 수 있는 퍼브(pub)도 입구와 창문을 꽃으로 장식한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고 집을 좋아해서 아파트가 겨우 15%뿐인 나라인데도 담장은 낮아 꽃 풍경을 열어놓고 산다.
살면서 잊지 못할 순간, 두려움이 희망으로 바뀐 날, 위로가 축하로 승화된 날이 떠오른다. “그때 생각나?”라고 말할 게 있는 것이 행복이다.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 것도, 함께 나눌 게 있는 것도 행복이라 믿는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살면서 좋았던 순간, 우리를 또 다른 차원으로 데려갔던 순간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떠올리는 것이다.”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우리 집 베란다에 꽃을 가꾸기로 한 것은 영국에서 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꽃구경을 시켜주기로 한 것은 영국 사람들이 정원을 개방해 함께 나누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좁은 베란다가 빨강 부겐베리아로 덮이고 화분마다 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엘리베이터 옆에 초대장을 붙였다. “베란다에 꽃이 한창입니다. 혼자 보기 아깝네요. 우리 집에 꽃구경 오실래요?” 라며 날짜와 시간까지 적었다. 차와 과자와 꽃을 나눴던 날이 생각난다.
수술 후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는 겨울날, 딸의 친구인 플로리스트에게 꽃을 부탁했다. 미리 꽂아놓은 꽃이 나를 맞아주었으면 해서다. 화려하지 않은 꽃이면 좋겠다고 했더니, 하늘하늘 갈라져 레이스 같은 하얀 튤립과 단정하고 꼿꼿한 흰 난초가 나를 반겼다. 나약하고 무거운 생각이 내 안에 들이치던 날, 나를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다시 시작하라고 한 건 꽃이었다.
수술과 힘든 항암치료를 마치고 암을 극복했다고 생각했을 즈음, 암이 의심된다고 해서 또 수술을 받았다. 아, 그때 나는 얼마나 휘청거렸던가. “암이 아니라면 파티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파티를 벌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여기저기에서 꽃병을 빌리고, 꽃이 돋보이도록 가구를 옮기고, 테이블마다 식탁보를 씌웠다. 음식은 케이크와 딸기만 준비하고, 30여명의 여인들에게 대접한 것은 꽃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과 “와~”하는 탄성소리를 상상하며, 거실 가득 꽃을 차렸다. 함께 울컥해져 부둥켜안은 날, 나는 여인들에게 꽃 전부를 화병 채 선물했다(화병은 나중에 돌려받기로 하고).
‘삶에서 나쁜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영국에 있으면 나쁜 게 별로 없다. 불편한 게 많은데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꽃을 많이 보아서가 아닐까. 영국에서 머무는 집에도 작은 정원이 있다. 오락가락하는 비 덕분에 물은 가끔 주고 매일 바라보기만 하면 되니 꽃 키우기가 참 쉽다. 없는 게 많은 시골이지만, 꽃만은 가득하다. 조용하고 단조로운 일상인데도 자주 “뷰티플~”을 외치느라 나는 지루하지가 않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다들 사는 게 바빠서겠지.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이 부족해서겠지. 우리가 배워야 할 일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사는 것도 있다. 느끼지 못하는 삶은 무덤덤한 삶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어야 하듯이, 사는 맛도 곁에 있어야 한다. 친구에게도 연인에게도 꽃을 선물하자. 그들이 마구마구 감탄하도록.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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