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마지막 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가 한국말로 가득 찼다. 미국의 유래 깊은 신년 축하 행사인 abc방송 ‘딕 크라크스 뉴 이어스 로킹 이브 2020’실황 중계 현장이다. 무대에 선 방탄소년단(BTS)의 히트곡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전주곡이 흘러나오자 그 리듬에 맞춰 맴버 7명의 이름을 차례로 외치고, 이어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르는 BTS 팬클럽 ‘아미(ARMY)’들의 목소리였다. 공연이 끝난 직후 이 공연 장면은 ‘BTSxRockinEve’‘BTSatTimesSquare’ 등의 검색어를 달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 SNS는 BTS를 비롯한 K팝 스타들과 전 세계 팬들이 소통하는 고속도로이다. K팝은 단순히 그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길을 넓히고 새로 뚫고 있다. SNS 원조 격인 트위터가 쇠락을 멈추고 깜짝 부활한 것도 BTS 등이 홍보 매체로 트위터를 이용하면서부터다. 2018년 매출이 20% 이상 증가하며 사상 최고 매출을 기록하자,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는 지난해 방한해 감사 인사를 했을 정도이다.
□ 지난달 말 반정부 시위에 궁지에 몰린 칠레 정부는 “K팝 팬들이 트위터를 통해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SNS상 시위 관련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 “K팝 팬이 시위 초기 8일 동안 관련 게시물을 400만건 이상 리트윗하며 불길을 키웠다”는 것이다. K팝 팬 소통 공간이 정치ㆍ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8월에는 홍콩 시위대 중 누군가 떨어뜨린 분홍색 토끼 인형 사진이 전 세계로 퍼지며 홍콩 시위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분홍색 토끼는 BTS 멤버가 만든 캐릭터로 ‘아미’들에게 친숙하다. SNS에는 “나라는 달라도 아미는 하나, 홍콩 아미 무사하길” 같은 댓글이 이어졌다.
□ K팝 열풍은 일방적으로 소비되던 대중문화를 SNS를 통해 스타와 팬이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초기에는 매력적 외모나 잘 훈련된 칼군무 등이 팬을 모았다. 하지만 K팝 팬들은 SNS를 통해 좋아하는 스타와 일상을 공유하고 진솔하게 고민을 나누는 수평적 유대를 쌓으면서 초국가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일회성에 그칠지 모른다. 그래도 혹시 심각해지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종교 갈등을 치유할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정영오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