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 정권 만능검 될까 우려 사실이지만
검찰을 성역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더 우선
이젠 청와대의 시간…조국 연결고리 끊어야
여러 해 전 얘기다. 당시 떠들썩했던 사건의 참고인으로 잘 나가던 경제관료 J가 검찰에 소환됐다. 젊은 수사관은 다짜고짜 J에게 B4 용지 두 장을 건넸다. 다섯 가지 질문을 주고는 종이를 꽉 채워 작성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옆 소파에 몸을 눕힌 채 눈을 붙였다.
J를 당혹스럽게 한 건 첫 번째 질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상세히 쓰시오.’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 신분이었고 설령 피의자라고 해도 이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억눌렀다.
40분쯤 지났을까. 젊은 수사관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잘 작성된 글을 읽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J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때 수사관이 한 말을 J는 토씨 하나 하나 또렷이 기억한다. “저기요, 우리는요. 마음만 먹으면 추기경도 구속시킬 수 있어요. 왠지 알아요? 태어난 게 죄니까요.” 참고인이라고 까불지 마라, 내 심사가 뒤틀리면 언제든 피의자로 둔갑시킬 수 있다, 이런 섬뜩한 경고로 엄습했다고 한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검찰이 지닌 힘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든 것은 없으니까. 문재인 정부가 ‘조국 = 청와대’라는 등식에 끝까지 매달리며 검찰에 일일이 맞대응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검찰 개혁이라는 취지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은 우려가 되는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다 제쳐두더라도, 적폐 청산이라는 게 정권마다 되풀이된다면 공수처는 이를 위한 정권의 만능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자유한국당이 결사 반대하지만, 혹여 정권을 잡는다면 과연 그때도 공수처에 적대적이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발등을 찍는 괴물로 변신하지는 않겠는가.
그렇다 해도 살아 있는 권력의 횡포를 방치할 순 없다. 최근 5년간 검찰의 처분이 이뤄진 검사에 대한 고소ㆍ고발 사건 9,903건 중 기소가 이뤄진 사건은 딱 14건이다. 기소율 0.14%다. 일반 형사사건 평균 기소율은 무려 34.8%다. 검찰은 사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강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통계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이 무서운 건 기소를 남용하는 것보다 기소를 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 것일 테다.
고소장 바꿔 치기 수사를 위한 부산지검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검찰이 무려 세 번이나 뭉갠 건 이 통계의 행간을 읽게 해준다.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경찰에 댔다고 하는데, 그런 검찰이 자신들이 청구한 송병기 울산 부시장의 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곧바로 기자들에게 뿌린 문자 메시지는 ‘사안이 매우 중한 점 등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한 보수 언론은 공수처법 통과 직후 해설기사에서 ‘공수처가 설립되면 개별 검사들에 대해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극단적으로 보면 윤석열 검찰총장, 김명수 대법원장도 수사 대상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왜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다. 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는 마당에, 그때 수사관의 말처럼 검찰은 마음만 먹으면 추기경도 구속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마당에, 왜 검찰총장은 안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청와대의 시간이다. 7월이면 공수처가 닻을 올릴 것이고, 검경 수사권 조정법 역시 조만간 국회를 통과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적 권한을 다하겠다”고 했고, 그 총대를 ‘추다르크’에게 맡겼다.
검찰이 칼자루를 쥐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이젠 청와대 스스로 조국과 검찰 개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조국을, 또 청와대를 검찰로부터 지키기 위한 인사권 행사가 헌법적 권한이라고 여기지도 말길 바란다. 공수처가 괴물로 변질되지 않게 보완하는 작업 역시 청와대의 의지가 중요하다. 국민들은 청와대와 검찰 어느 한쪽이 아니라, 검찰이건 공수처건 청와대건 그 어느 곳도 성역이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지지할 뿐이다.
이영태 디지털콘텐츠국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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