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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미래? 헬조선엔 없어요” 경쟁에 탈탈 털린 Z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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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미래? 헬조선엔 없어요” 경쟁에 탈탈 털린 Z세대

입력
2020.01.04 04:40
수정
2020.01.04 08:19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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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 넌 누구니?] <2>“한국은 ‘헬조선’ 아닌가요”

71%가 “한국은 헬조선” 44%가 “경쟁에 삶의 질 악화”

희망 안 보여 정치 무관심… 41%가 “부모님보다 못살 것”

Z세대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대학생 이승세(왼쪽부터 순서대로) 채성준 윤민정 박도형씨, 고등학생 이창훈군이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 16층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 기자
Z세대 심층 인터뷰에 참여한 대학생 이승세(왼쪽부터 순서대로) 채성준 윤민정 박도형씨, 고등학생 이창훈군이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 16층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 회의실에 앳돼 보이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였다. 한국일보가 Z세대 인식조사를 위해 진행한 전화와 대면 방식의 심층 인터뷰 중 대면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회 초년생 등 다양한 구성만큼이나 주제에 대해 다채로운 논의가 오갔지만 한 가지 질문에는 이구동성으로 “그렇다”는 답변이 나왔다. 한국을 ‘헬조선’이라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헬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조선시대’의 합성어다. 불과 몇 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어느새 젊은이들의 입에 착 달라붙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팍팍한 사회를 지적할 때 자주 언급한다.

말이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을 투영했다는 뜻이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대학생 정모(24)씨는 “조선이란 건 계급차이가 있는 사회인데, 여전히 그런 신분제적인 성격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Z세대 10명 중 7명 “헬조선 맞다”

Z세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지옥처럼 전혀 희망이 없는 헬조선에 빗대는데 거리낌이 없다. 기성세대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도 훨씬 떨어진다. 남들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는 삶이 그들의 눈에 비친 힘겨운 현실이다.

한국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4일부터 사흘간 1,000명(Z세대 500명, X세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여론조사에서 ‘한국은 헬조선이다’는 질문에 Z세대 중 70.5%가 동의했다. 이와 달리 X세대는 37.8%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전화 또는 대면 방식 심층 인터뷰에 응한 Z세대 31명 중 26명도 역시 우리 사회를 헬조선으로 부를 만큼 힘들다고 토로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각종 혜택을 받으며 명문대에 진학한 것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이창훈(20)씨는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한 입장에서 조국 딸은 쉽게 의학논문 1저자에 등재됐고 대학도 그걸로 갔다고 하니 굉장한 회의감이 밀려왔다”며 “3년 간 학종을 준비했는데 수시에 떨어진 나는 조국 딸과 참 비교되더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Z세대의 사회관 -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Z세대의 사회관 - 송정근 기자

한국 사회를 불신하는 비율도 높았다.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이다’란 질문에 Z세대의 74.3%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 중 28.5%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강한 불신을 표현했다.

고등학생 김유진양은 “미술 공부를 하는데 입시학원 선생님이 부모님과 상담하면서 ‘여기 대학에 붙여줄 테니 600만원을 달라’는 경우도 봤다”며 “한국 사회에서 입시나 각종 기회는 공정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리다 보니 경쟁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경향을 보였다. ‘경쟁은 개인의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는 질문에 긍정하는 비율이 43.8%로, 기성세대(29.4%)보다 높았다.

본보의 Z세대 인식조사에서 “한국은 헬조선이다”는 질문에 Z세대 70.5%가 동의했다. 사진은 취업박람회에서 청년들이 취업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본보의 Z세대 인식조사에서 “한국은 헬조선이다”는 질문에 Z세대 70.5%가 동의했다. 사진은 취업박람회에서 청년들이 취업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연세대에 재학 중인 이모(24)씨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면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패배자로 취급하는 사회 때문에 어떡하든 이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이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말했다.

‘만성 경쟁’에 시달리는 만큼 스트레스도 극심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는 편’이라는 Z세대는 X세대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42.4%로 조사됐다. ‘생활수준을 남들과 자주 비교한다’고 답한 Z세대도 X세대 대비 2배 많은 34.5%나 됐다.

◇“사회 참여? 내 앞가림도 어려워”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쉽게 말하지만 Z세대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대꾸한다.

고려대 재학생 정모씨(23)는 “친구 등 내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취업이지, 사회 이슈가 아니다”며 “당장 내가 먹고살기 힘든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나. 정치 혐오라기보다는 무관심이 내재돼 있는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Z세대를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에서 Z세대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각종 혜택을 받으며 명문대에 진학한 것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해 9월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 주민 등이 서울대 관악캠퍼스 학생회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Z세대를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에서 Z세대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각종 혜택을 받으며 명문대에 진학한 것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해 9월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 주민 등이 서울대 관악캠퍼스 학생회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인문계 졸업생의 어려움을 반영한 ‘문송합니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 같은 자조 섞인 말이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요즘에는 ‘이송합니다(이공계라 죄송합니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나 때는 말야’로 시작하는 기성세대의 대학 시절 캠퍼스의 낭만은 영화 속에서나 봤던 이야기다.

서울대에 다니는 윤민정(24)씨는 “예전에 있었다는 대학의 낭만은 문화적 코드로만 소비되지, 아무도 체감할 수 없다”며 “사회 참여만 해도 수업 안 빠지는 것 자체가 기본인데, 누가 수업을 빼먹고 집회를 가겠나”라고 말했다.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도 우리 사회 자체가 이를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민생, 복지와 함께 청년을 주요 키워드로 외치지만 본보의 온라인 여론조사에서 정치 참여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한 Z세대는 전체의 37.4%에 그쳤다.

◇“이번 생은 망했고 희망도 없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은 Z세대가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다. 그만큼 삶에 대한 희망보다 절망감이 만연했다. 본보의 여론조사에서도 ‘한국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계층상승이 가능하다’는 문항에 Z세대의 71.5%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단국대에 재학 중인 이승세(25)씨는 “뭔가 뚜렷한 희망이 있으면 그걸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겠지만 정말 앞이 보이질 않는다”며 “우울감 때문에 친구들이랑 일부러 시사, 정치 이야길 안 하려 한다”고 말했다.

Z세대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감도 크지 않았다. ‘투표를 하면 정치가 달라진다’는 질문에 44.5%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정치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지점이다.

서울 배재고에 재학 중인 강민군(18)군은 “빠르게 고령화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선 대부분의 유권자가 노년층이니 우리가 투표를 한다고 해도 뭔가 바뀔 것 같지가 않다”며 “당장 명절에 친척 어른들이 모였을 때 내가 어떤 의견이라도 피력하면 콕 찍어 언급은 하지 않아도 ‘네가 감히’라는 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저론’ 역시 Z세대의 주요 화두다. 성공적인 입시를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은 Z세대에 상식으로 통한다. 여론조사에서도 41.4%는 ‘나의 부모님 세대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질 것 같다’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했다. 지난해 정규직 취업에 성공한 안모(24)씨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건 그야말로 옛말이다. 부모보다 잘살 수 있는 사람은 10명 중 한 명일 것”이라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만능주의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지옥이며, 헬조선은 이들이 그리는 자화상”이라며 “데이트나 결혼도 안 하고,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도 ‘왜 우리가 노예를 낳아야 하나’고 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이 개인화됐다는 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우리 성장의 동력이었던 ‘경쟁의 신화’를 부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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