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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봉오동 전투, 몇몇 영웅 아니라 수천 독립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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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봉오동 전투, 몇몇 영웅 아니라 수천 독립군의 승리”

입력
2020.01.04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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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최성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가 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인 최운산(사진 왼쪽) 장군과 아버지 얼굴이 저장된 휴대폰을 들고 있다. 홍인기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최성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가 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인 최운산(사진 왼쪽) 장군과 아버지 얼굴이 저장된 휴대폰을 들고 있다. 홍인기 기자

“봉오동 전투는 기적이 아닌 준비된 승리였습니다. 독립군의 몇몇 영웅적인 인물에 의한 기적 같은 승리로 비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최성주(62)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는 100년 전 봉오동 전투가 신화적으로 전달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최 이사는 관객 500만명에 육박하는 영화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도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 독립군이 승리했다는 사실만 맞다”며 “영화적 각색을 감안하더라도 고증이 부실했다”며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그가 특히 실망한 장면은 독립군 기지로 상징된 농가 몇 채. “영화 후반부에 이 장면이 나오는데 말도 안 된다”며 “할아버지인 최운산(1885~1945) 장군이 1909년부터 건설한 봉오동 기지는 9,900㎡(3,000평) 되는 평지에 두께 1m의 토성이 방어벽을 치고 있었고 연병장과 막사 3동을 갖췄다”고 주장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 봉오동에서 독립군 통합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157명, 부상자는 200여명이었던 데 반해 독립군은 4명이 숨지고 부상자가 약간 발생한 데 불과했다.

최 이사는 4년 전부터 ‘봉오동 전투=홍범도 장군’인 세간의 인식을 깨는 주장을 지속해서 하는 중이다. 주장의 요지는 최 이사의 큰할아버지인 최진동(1883~1941) 장군이 당시 각종 독립군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부장)이고 할아버지인 최운산 장군은 부대 운영을 위한 자금 지원과 무기 구입을 책임진 참모장이었다는 것이다. 작은 할아버지인 최치흥(1891~1954)은 참모였다.

반면 홍범도 장군은 제2연대장,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제1연대장으로 최씨 형제보다 계급상 아래였다. 최 이사는 이렇게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이 홍범도 장군 깎아 내리기로 비칠까 봐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최 이사는 대한북로독군부 병력을 3,000~4,000명 정도로 추정했다. 할머니가 매일 이 많은 군인들을 밥해 먹이느라 고생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군사학 표현을 빌리면 최씨 할머니가 독립군의 핵심 병참기지였던 셈이다.

최운산 장군의 이름이 8개나 있었다는 일화도 들려줬다. “할아버지가 러시아 퇴역 장교 등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오다가 1920년 초에는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대량 구입했는데 일제에 들키지 않기 위해 가명을 여러 개 쓴 걸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최씨는 봉오동 전투의 개가가 상식 선에서 이해되기를 바랐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정규군이 맞붙은 첫 전투가 봉오동 전투”라며 “장기간에 걸쳐 독립군이 기관총과 대포 등 최신식 무기를 갖추고 훈련된 병사를 양성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이 있어야 당시 세계 최강 반열인 일본군을 무찌르는 게 가능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최씨는 독립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 최운산 장군이라고 주장한다. “할아버지는 당시 간도에서 부산의 6배에 이르는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기름공장, 비누공장 등 기업을 운영하면서 거부가 된 후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지원해 최신식 무기로 무장시켰다”고 말했다.

최근 최씨에게는 기쁜 일이 하나 생겼다. 큰 할아버지인 최진동 장군이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학계에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운산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동영상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최씨는 “아직까지도 최진동ㆍ최운산 장군에 대한 자료가 틀린 게 너무 많다”며 “봉오동 전투가 후대에 전승되는 역사가 될 수 있도록 학계가 더 많이 연구하고 철저히 고증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이 됐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철저한 준비를 거쳐 이룬 승리가 봉오동 전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배성재 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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