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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반정부ㆍ반미 뒤섞인 유혈의 ‘시아파 벨트’ 중동 화약고로

입력
2020.01.03 20:0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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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반정부 시위가 2개월째에 접어든 지난해 11월 6일, 한 시위자가 수도 바그다드의 타흐리르 광장 인근 빌딩에서 하산 로하니(왼쪽) 이란 대통령과 모하메드 알 할부시(오른쪽) 이라크 국회 대변인 위에 크게 빨간 엑스자(X) 표시가 그려진 시위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다. 민생고에서 시작된 이라크 반정부 시위에서는 그간 이란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컸다. 바그다드=AP 연합뉴스
이라크 반정부 시위가 2개월째에 접어든 지난해 11월 6일, 한 시위자가 수도 바그다드의 타흐리르 광장 인근 빌딩에서 하산 로하니(왼쪽) 이란 대통령과 모하메드 알 할부시(오른쪽) 이라크 국회 대변인 위에 크게 빨간 엑스자(X) 표시가 그려진 시위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다. 민생고에서 시작된 이라크 반정부 시위에서는 그간 이란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컸다. 바그다드=AP 연합뉴스

지난 석 달 동안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헤즈볼라)으로 이어지는 중동지역 내 이른바 ‘이슬람 시아파 벨트’에서 반(反)체제ㆍ반(反)정부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 초기에는 대체로 민생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평화시위였으나, 군과 경찰의 강경진압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시위도 점차 폭력화하는 양상이다. 국내 정치 변동은 물론 내전과 중동 국제정세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의 큰 혼란이다.

◇반이란ㆍ반미 뒤섞인 이라크... 괴한 총기난사도

지난해 10월 1일 먼저 이라크에서 부패 척결, 일자리와 질 높은 공공서비스 제공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12월 말 이라크 인권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군경의 유혈진압과 폭력으로 최소 490명이 숨지고 2만2,000여명이 부상했다. 인명피해가 커지자 2011년 ‘아랍의 봄’ 상황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011년 2월 25일 ‘분노의 날’에는 하루만에 35명이 숨졌다. 당시 이라크는 내전 등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이를 틈타 이슬람국가(IS)가 급격히 세를 불렸다.

지난해 12월 7일, 이라크 남부 나자프에서 전날 바그다드 총기 난사로 숨진 반정부 시위대의 관이 운구되고 있다. 나자프=EPA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7일, 이라크 남부 나자프에서 전날 바그다드 총기 난사로 숨진 반정부 시위대의 관이 운구되고 있다. 나자프=EPA 연합뉴스

이번에도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6일 밤 정체불명의 무장괴한이 바그다드 도심에서 시위대뿐만 아니라 군경에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25명 이상이 숨지고 130명 이상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불안정화 전략’을 실행하는 무장세력의 테러로 정치적 혼란이 내전은 물론 내전의 국제화로까지 비화될 위험이 있다.

미국이 지난달 29일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시설을 폭격한 데 분노한 민병대와 이들을 추종하는 시위대가 31일 수도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을 습격, 응접실에 불을 지르고 있다. 바그다드=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 지난달 29일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시설을 폭격한 데 분노한 민병대와 이들을 추종하는 시위대가 31일 수도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을 습격, 응접실에 불을 지르고 있다. 바그다드=로이터 연합뉴스

아울러 같은 달 14일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민병대(하시드 알사비ㆍPMU)와 이들의 지지자 수백여명이 반미 집회를 열었고, 31일에는 친(親)이란 시아파 시위대가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집기 일부를 불태우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미국 국방부는 즉각 ‘이란 배후설’을 제기하면서 사태 대응을 위해 병력 750명을 추가로 급파한다고 밝혔다. 최대 4,000명의 공수부대가 더 배치될 수 있다는 미 언론 보도도 나오면서 긴장감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27일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도시 나자프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 영사관에 방화를 하고 있다. 민생고에서 시작된 이라크 반정부 시위에서는 그간 이란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컸으나 최근에는 ‘반미 기류’ 역시 고조되는 상황이다. 나자프=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7일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성지도시 나자프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이란 영사관에 방화를 하고 있다. 민생고에서 시작된 이라크 반정부 시위에서는 그간 이란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컸으나 최근에는 ‘반미 기류’ 역시 고조되는 상황이다. 나자프=로이터 연합뉴스

그간 이라크 시위대는 대체로 이란의 내정간섭에 거부감을 표하고, 친이란 성향인 현 정부의 실정을 규탄해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IS와 맞서 싸워온 PMU의 산하 무장세력인 카타이브 헤즈볼라(KH)의 군사기지 5곳을 공습하면서 ‘반미 기류’가 고조되는 분위기다. 총리가 사임한 데 이어 대통령도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 가운데 반정부ㆍ반이란ㆍ반미 구호가 뒤섞이면서 이라크의 혼란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란 정부 강경진압에 “1,500명 사망” 보도

이슬람교와 가톨릭, 그리스정교 등 여러 종파가 어우러진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에서도 지난해 10월 17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한때 레바논은 ‘중동의 스위스’로 불렸고, 수도 베이루트에는 ‘중동의 파리’라는 애칭이 붙었다. 그만큼 평화롭고 낭만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민생고가 문제였다. 연간 국내총생산의 150%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부채(860억달러)와 37%에 달하는 35세 미만 청년실업률, 전기ㆍ상수도 등 공공서비스의 결핍, 시리아 난민의 지속적인 유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이 왓츠앱 등 모바일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자 민심이 폭발했다.

지난달 15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의회 광장 인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진압경찰이 설치한 경찰 안전펜스를 쓰러뜨리고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지난달 15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의회 광장 인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진압경찰이 설치한 경찰 안전펜스를 쓰러뜨리고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레바논은 헌법상 국교가 없고 대신 18개의 종교ㆍ종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헌법에는 종파 간 권력 분배가 규정돼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 마론파가 대통령을 맡고, 총리와 국회의장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담당하는 독특한 정치체제다. 그럼에도 레바논이 시아파 벨트로 묶이는 이유는 시아파 정치ㆍ군사조직인 헤즈볼라의 강한 인상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5일 이란 정부가 휘발유값을 리터 당 1만리알(약 100원)에서 1만5,000리알(약150원)으로 기습 인상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사진은 시위 사흘째인 17일 수도 테헤란의 주유소가 시위대의 방화로 하얗게 불탄 모습. 테헤란=AP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5일 이란 정부가 휘발유값을 리터 당 1만리알(약 100원)에서 1만5,000리알(약150원)으로 기습 인상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사진은 시위 사흘째인 17일 수도 테헤란의 주유소가 시위대의 방화로 하얗게 불탄 모습. 테헤란=AP 연합뉴스

결정적으로 11월 15일부터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도 휘발유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 보안대와 정예 혁명수비대는 강경진압으로 대응했고, 인터넷은 열흘간 완전히 차단됐다. 정부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수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지난달 말 로이터통신은 10대 17명과 여성 400명을 포함해 1,500여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도 시위 진압 과정에서 피살된 이들이 1,000명이 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란 당국은 “외세가 사망자 수를 과장하고 있다”며 ‘가짜 뉴스’라고 반박하는 상황이다.

◇시아파 벨트 연쇄 시위 배경엔 ‘對이란 제재’

시아파 벨트에서 이처럼 연쇄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강력한 대이란 제재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전임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맺었던 이란핵협정(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2018년 5월 8일 돌연 탈퇴하고, 이란에 경제 재제를 재부과하면서 이란 경제는 극도로 피폐해지는 중이다. 석유 수출길이 막힌 이란이 동맹인 이라크ㆍ레바논에 대한 금전적 지원을 줄이자 이들 국가의 민생고도 가중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8년 5월 8일 미국의 이란핵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 탈퇴를 선언하는 각서에 서명한 뒤 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핵 합의는 거짓”이라며 “이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해왔다”고 주장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8년 5월 8일 미국의 이란핵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 탈퇴를 선언하는 각서에 서명한 뒤 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핵 합의는 거짓”이라며 “이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해왔다”고 주장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특히 이번 이란 시위는 1979년 혁명으로 지금의 이란 체제(이란이슬람공화국)가 수립된 이래 가장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평가된다. 시위대의 ‘이란 정부의 시아파 지원 반대’, ‘반이스라엘 정책 반대’ 구호 등에서 그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시위대는 발포 명령을 내린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 최고국가안보회의(SNSC)를 거세게 비난했다. 이란의 초대 최고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의 반지를 그려놓은 기념관, 이슬람 종교학교, 금요 예배소 등이 잇따라 불탔다. 시위 현장에서는 심지어 혁명으로 쫓겨났던 왕(왕정)의 회귀를 요구하는 “이란의 샤(왕), 이란으로 돌아오라”는 구호까지 나왔다.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지난해 11월 27일 수도 테헤란의 바시즈(Basij) 민병대 간부 대표단들과의 만남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하메네이는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이란 반정부 시위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오만한 나라(미국)가 꾸민 매우 위험하고 심대한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헤란=EPA 연합뉴스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지난해 11월 27일 수도 테헤란의 바시즈(Basij) 민병대 간부 대표단들과의 만남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하메네이는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이란 반정부 시위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오만한 나라(미국)가 꾸민 매우 위험하고 심대한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헤란=EPA 연합뉴스

이란 정부는 반체제ㆍ반정부 시위를 진압한 후 체포된 시위자들에게 최고 사형 등의 강력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하니 대통령은 시위 닷새째이던 지난해 11월 19일 트위터에서 “우리는 군사ㆍ정치ㆍ안보전쟁에서 적을 물리쳤다”면서 “신의 은총으로 ‘경제전쟁’에서도 반드시 적을 격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란의 고위 지도층이 시아파 벨트 내 반정부 시위의 ‘배후’라고 주장해온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겨냥한 동시에 시위대, 즉 자국의 국민들까지 ‘적’으로 돌린 셈이다.

◇한파 닥친 ‘시아파 벨트’... 민주화의 꽃 필까

[저작권 한국일보] 시아파 벨트 시위.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시아파 벨트 시위. 송정근 기자

2011년 ‘아랍의 봄’(아랍 민주화 혁명)은 일부 국가에서 긍정적인 정치 변화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내전과 사회 혼란, 종교 간 대립 고조 등으로 사실상 ‘아랍의 겨울’로 변질됐다. 민생고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시아파 벨트의 반체제ㆍ반정부 시위가 민주화 도미노로 이어질지, 그래서 ‘제4의 민주화 물결’이 될지, 아니면 ‘시아파 지역의 한파’로 변질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다만 현재까지의 상황은 강경진압 등으로 ‘한파’가 불어닥친 모습이다. 혼란이 장기화될 경우 내전이 격화하고 이들 내전이 국제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새해벽두 미국의 전격적인 공습으로 이란 군부의 실세가 사망하고 이란군이 복수를 경고한 상황은 시아파 벨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임을 보여준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ㆍ2020년 한국중동학회 회장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ㆍ2020년 한국중동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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