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문 때문에 부모를 경찰에 넘기는 상상…민주화 운동가 아버지 삶 추적한 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문 때문에 부모를 경찰에 넘기는 상상…민주화 운동가 아버지 삶 추적한 딸

입력
2020.01.03 04:40
25면
0 0
딸의 일기 속에서 아버지는 ‘참 훌륭한 일을 하시는’ 사람이다. 문학동네 제공
딸의 일기 속에서 아버지는 ‘참 훌륭한 일을 하시는’ 사람이다. 문학동네 제공

아버지는 2주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 가입자와 지도자 10명이 지명수배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수배자이다.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던 이들은 모두 그만뒀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참 훌륭한 일을 하신다’고 한다. 어린 딸은 이렇게 기도한다. “아빠께서 안 잡히셨으면 좋겠다.”

장혜령 작가의 소설 ‘진주’는 민주화 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삶을 더듬어가는 딸의 이야기다. 작가의 자전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민주주의와 운동에 헌신하느라 자신과 가족을 희생시켰지만, 훗날 사료실의 해묵은 기록이나 후일담으로만 남은 아버지의 삶을 작가가 된 딸이 복원해낸 결과물이다.

소설은 어느 해 겨울 이제 막 교도소에서 나온 아버지가 사춘기 딸과 친해지기 위해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던 일화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겁이 많은 딸에게 “세상은 어둡고 무서운 곳인데 자전거 타는 작은 일부터 두려워한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은 어둡고 무서운 곳’이라는 아버지의 말이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딸이기에 자전거를 배운다는 것은 아득한 세상의 이치까지 깨우치는 일이다. 운동가의 딸로 산다는 건 그런 의미다.

어린시절의 장혜령 작가가 종이로 만든 옷수선집과 즐거운집. 저자 제공
어린시절의 장혜령 작가가 종이로 만든 옷수선집과 즐거운집. 저자 제공

아버지는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한다며 붉은 머리띠를 둘러매고 오른 주먹을 힘껏 쥐고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는 이다. 확성기로 연설하고 불법 전단을 나눠주는 남자들 사이에, 노동자들에게 배포할 인쇄물에 들어갈 글을 작성하고 회람하며 토론하던 수배자들 사이에 아버지는 있다.

아버지가 부재한 시간, 어머니는 낮에 의류 수선을 하며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밤에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하느님이시여, 그이의 앞길을 지켜주소서.” 그리곤 언제라도 경찰이 집에 들이닥칠 수도 있음을 딸에게 상기시킨다. 딸은 안기부에 억류돼 서른 여섯 시간이 넘도록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당하고선 부모를 대신해 무언가 진술해버린 어린아이를 떠올리다 밤잠을 설친다.

이런 아버지를, 석방된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현실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떤 친구들은 유학을 거쳐 학계에 자리잡고, 정당에 들어가 정계에 몸을 담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 독재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버지는 삶을 새로 꾸려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으며 전과가 있는 이력으로는 일반 회사에 갈 수 없다. 전기 배선 기술을 배우고, 1종 면허를 따고, 영어 시험 급수를 취득하고, 엑셀 함수값 계산법을 익힌다. 그러나 어디에나 있을 법한 회사의 작은 부패 하나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는 금세 그만둔다. 그런 남편을 두고 아내는 어둠 속에서 눈물 흘리며 말한다. “이제 불의를 참아달라”고.

진주

장혜령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300쪽ㆍ1만5,000원

1970년대 독재타도에서부터 1980년대 민주화 운동, 1990년대 노동운동과 2000년대 탄핵 집회까지. 소설은 아버지에서 딸로 이어지는 부녀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운동’이 할퀴고 간 한국 현대사를 넓게 조망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 작가의 어릴 적 일기, 악보, 뉴스 보도 등 다양한 기록물이 활용된다. 에세이로도, 르포르타주로도 읽히는 이 글에 ‘소설’이란 이름이 붙은 건 한강 작가의 권유 덕이다. 한 작가는 저자가 보낸 글을 읽고 “에세이를 초과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는 전언을 보내왔다.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화법에선 한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도 엿보인다. 실제 저자 또한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책 제목 ‘진주’는 진주교도소를 뜻한다. 열살 무렵 수감된 아버지를 특별면회하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향했던 도시. 그곳으로 향하면서 작가는 아버지의 선택을 용서하는 한편, 동요 대신 투쟁 착취 노동 자유 해방 민중 같은 단어를 먼저 익혔던 자신과의 화해도 시도한다.

작가는 이렇게 끝맺는다. “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 기록되지 않는다면 사라질지 모를 기억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역사가 미처 마련하지 못한, 아버지와 딸의 자리를 스스로 일궈낸 성취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