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법당국이 카를로스 곤 전 닛산ㆍ르노 회장의 ‘영화와 같은’ 레바논 도주로 단단히 허를 찔렸다. 일본에선 도주 과정에 대한 확인이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아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내 공범이 있었다는 등 구체적인 정황들이 외국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더욱이 일본에선 “사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곤 전 회장이 국적을 보유한 프랑스와 레바논에선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면서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도주 도운 아내 “인생 최고의 선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온라인판(版)은 12월 31일(현지시간) 곤 전 회장의 도주에는 몇 주 전부터 아내 캐럴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본 내 공범의 도움으로 지난 주말 모여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보도했다. 캐럴은 WSJ에 부부의 재회에 대해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또 곤 전 회장 신변을 둘러싸고 변호사와 가족이 프랑스에 개입을 요청했던 것 외에 (레바논 외에) 프랑스와 브라질, 미국으로 도주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밝혔다.
WSJ과 프랑스, 레바논 현지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해 4월 거주지 제한 등의 조건을 수용하고 보석 허가를 받았던 곤 전 회장은 도쿄 미나토(港)구에서 지내왔다. 그는 공판을 앞두고 크리스마스에 변호인인 히로나카 준이치로(弘中惇一郎) 변호사를 만난 이후 작전을 실행했다. 이날 오후 곤 전 회장의 자택에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한 연주자들로 위장한 민간 경비회사 또는 민병조직대원들이 들어갔고, 이들이 연주를 마치고 곤 전 회장을 악기 상자에 숨겨서 나왔다. 이에 마이니치(每日)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정보원이 밝혀지지 않아 신빙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곤 전 회장을 태운 것으로 보이는 개인 전용기는 29일 오후 11시 10분 오사카(大阪)의 간사이(關西)공항을 이륙, 30일 오전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후 레바논으로 향하는 다른 소형 제트기가 준비돼 있었는데, 이들 모두 터키 국적 항공사 소속이다. 곤 전 회장 측이 터키를 경유지로 선택한 배경에는 부인 캐럴의 이복 오빠가 터키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프랑스 르몽드가 보도했다.
檢 “日 형사사법 수치, 전세계에 알린 셈”
아사히(朝日)신문은 1일 국토교통성 간부를 인용 “개인 전용기를 이용하는 경우도 일반 승객과 같이 CIQ(세관ㆍ출입국관리ㆍ검역)을 거칠 필요가 있다”며 “이를 거치지 않고 출국하는 것은 100% 있을 수 없다”고 전했다. 국빈이나 대사관 관계자들은 CIQ 검사 없이 통과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사전 신청이 필요하고 대리인이 심사를 받아야 한다. 다만 X선에 의한 수하물 검사는 개인 전용기의 경우 의무화하지 않아 기장 등의 판단으로 생략된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이를 감안하면 곤 전 회장이 숨어 있던 악기 상자가 수하물 검사 없이 터키행 개인 전용기에 실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곤 전 회장은 이스탄불을 경유해 31일 오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레바논 정부는 “곤 전 회장이 본명이 적힌 프랑스 여권을 사용했다”며 합법적인 입국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보석 당시 프랑스, 레바논, 브라질 여권을 변호인에게 맡긴 곤 전 회장이 어떻게 프랑스 여권을 갖고 입국했는지도 궁금증이 남는 부분이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레바논 현지 언론에서는 곤 전 회장이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을 만나 정부의 삼엄한 경비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과 레바논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 이에 일본 정부가 레바논에 곤 전 회장의 신병 인도를 요청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외교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도쿄지검은 곤 전 회장의 도주가 확인된 전날 보석 취소를 신청했고, 도쿄지방재판소는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곤 전 회장 측이 납부한 보석 보증금 15억엔(약 160억원)은 몰수됐다. 그러나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변호인 측은 보석 중 도주한 곤 전 회장 소식에 “아님 밤중에 홍두깨”라며 “전혀 몰랐다”고 밝혔고, 보석을 허가해 준 법원(재판소) 측도 “충격”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다. 이에 도주 가능성을 이유로 보석 허가를 강하게 반대해 온 도쿄지검 특수부는 “언젠가 도망칠 줄 알았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보도했다. 한 검찰 간부는 “일본 형사사법제도의 수치를 전 세계에 알린 법원과 변호인의 책임이 엄중하다”고 비판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mr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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