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박해서 벗어났다” 성명… 일 정부 까맣게 몰라
불공정 재판, 혐의 전면 부인… 양국 외교분쟁 가능성
일본에서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이 보석 상태에서 레바논으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정부는 불법 출국인 만큼 즉각 신병 인도를 요청하겠다는 입장이나 레바논 측은 거부 의사가 강해 양국 간 외교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은 30일(현지시간) 곤 전 회장이 이날 오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전날 밤 터키를 거쳐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레바논으로 향한 것으로 전해졌다. 곤 전 회장은 레바논 국적을 갖고 있다. 조부가 레바논계인 그는 브라질에서 태어나 6세 때 레바논으로 이주한 뒤 고교까지 다니다 프랑스에 귀화했다.
곤 전 회장은 출국 사실이 보도되자 미국 대변인을 통해 성명을 내고 “나는 지금 레바논에 있다”며 “유죄가 전제되고 차별이 만연하며 기본적 인권이 무시되는 일본 사법제도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불공정과 정치적 박해에서 빠져 나왔다. 마침내 미디어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금융상품거래법 위반과 특수배임죄 등 혐의로 구속됐다가 10억엔의 보석금을 내고 올해 3월 풀려났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재구속된 뒤 다시 보석금 5억엔을 지불하고 거주지를 도쿄(東京) 일대로 한정하는 조건으로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본 정부는 곤 전 회장의 출국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NHK는 외무성 관계자의 말을 빌려 “출국이 금지된 인물이라 사전에 파악했다면 법 집행 기관에 통보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법무성과 검찰도 “사실 관계를 파악 중”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다만 재판을 관할하는 도쿄지방재판소는 “(출국을 금지한) 보석 조건을 변경하지 않았다”고 밝혀 도피성 출국에 무게를 실었다. NHK는 “출입국관리소 자료에는 곤 전 회장의 기록이 없어 가명으로 빠져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레바논 보안당국은 31일 “곤 전 회장이 합법적으로 레바논에 입국했고 어떤 법적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이 레바논 현지 매체를 인용해 보도했다. 레바논의 한 치안 당국자는 NHK에 곤 전 회장의 입국 절차와 관련해 “그는 다른 이름으로 들어왔다. 카를로스 곤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교도통신과 요미우리신문은 곤 전 회장이 나무상자에 숨어 터키까지 가, 터키에서부터 개인용 제트기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레바논 군사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레바논 정부에 곤 전 회장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보석을 취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곤 전 회장은 일본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 도주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간 자신의 혐의는 닛산 경영진이 꾸며냈으며 르노와 닛산, 미쓰비시 3사의 경영 통합에 반대하는 일본 내 세력, 정확히는 일본 정부가 수사와 체포, 기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법처리를 배후 조종했다고 믿고 있다. 그의 측근은 WSJ에 “곤 전 회장이 조만간 레바논에서 일본 측의 부당한 대우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도쿄지검 특수부는 보수 91억엔을 유가증권 보고서에 축소 기재한 혐의로 곤 전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오만 및 사우디아라비아 지인에게 송금하면서 회사법을 어긴 혐의(특수배임)도 적용됐다.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될 경우 그는 최장 징역 15년형에 처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이번 사건이 일본과 레바논 간 외교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레바논 정부는 곤 전 회장 체포 때부터 주베이루트 일본대사를 불러 경위를 따져 묻는 등 줄곧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 일본에 변호인단을 파견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곤 전 회장의 레바논행을 둘러싸고 레바논 정부가 모종의 역할을 할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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