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 29일(현지시간)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 시아파민병대의 5개 군사시설을 공습(31일자 14면)한 뒤 이라크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대통령과 총리가 연이어 사퇴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라크 정부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미국을 비난하면서 그간의 ‘반이란ㆍ반정부’ 시위 정국이 급격하게 ‘반미’ 기류로 전환하는 모습이다. 일부 시위대는 미국 대사관 난입을 시도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군 공습으로 숨진 ‘카타이브-헤즈볼라’ 조직원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난 31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시위대는 대사관 주변의 감시 카메라를 부수고 외벽과 감시초소에 불을 질렀다. 일부는 대사관 차량 출입구를 통해 대사관 내부로 진입했지만 본관에는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은 시위대가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보도했다. 매슈 툴러 대사 등 대사관 근무자들은 시위를 피해 대사관을 비웠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시위대의 미국 대사관 습격은 두 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 반정부 시위가 반미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실제 바그다드와 바스라, 나자프 등 주요 도시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의 대규모 반미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카타이브 헤즈볼라 측은 “미국과 그 용병을 상대로 한 전쟁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며 보복을 예고했다.
이라크의 기존 반정부 시위는 이란에 우호적인 현 정부의 무능과 부패, 이란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IS 격퇴전에서 공이 큰 시아파민병대를 공격하면서 반이란 기류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미군이 F-15 전투기 편대를 투입해 시아파민병대 카타이브-헤즈볼라의 이라크(3곳)와 시리아(2곳) 내 군사시설 5곳을 공습하면서 최소 25명이 사망하고 55명이 다쳤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란으로부터의 위협을 공습 이유로 설명했다.
아델 압둘마흐디 이라크 임시총리는 지난 30일 미국의 공습을 ‘용납할 수 없는 악의적 공격’이라고 규정한 뒤 “이라크의 주권을 침해하면서 지역 안보에 대한 위험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를 초치하겠다”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라크 국가 안전보장회의(NSC)도 “미국이 주도하는 대(對)이슬람국가(IS) 연합과의 관계를 재고할 것”이라며 “미군은 이라크의 주권을 위반하면서 미국의 정치적 우선순위와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고 가세했다.
이라크 시아파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는 미국의 공습을 겨냥해 “이라크가 역내와 국제적 분쟁의 장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경 시아파 성직자이자 의회 최다정파인 알사이룬의 지도자 무크타타 알사드르도 “미군의 이라크 주둔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적ㆍ법적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특히 미군 철수를 위해 의회 내 경쟁세력인 친이란 성향의 ‘파타 동맹’과도 협조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군의 공습이 정파를 초월한 ‘반미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중동지역 다른 국가들도 미국 규탄 대열에 합류했다. 시리아 외무부는 “미국은 이라크 내부 문제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리 라비에이 이란 정부 대변인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행된 미국의 공습은 국제법 위반이자 명백한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다.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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