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사회, 신음하는 지구촌] “정부 밀매 위해 공급 조절” 관측도
“어제는 차에 기름 넣는데 두 시간 넘게 기다렸습니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인데 뭔가 잘못된 거죠.”
10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도착하자 현지 통역이 한 말이다. 카라카스 시내에 접어들자 주유소마다 대기하고 있는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12일 찾은 지방 도시 마라카이에서는 사정이 더욱 심했다. 카라카스-마라카이를 잇는 도로의 주유소 인근에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기름이 떨어져 차를 밀고 있는 운전자들, 길가로 나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앞 차들을 바라보는 운전자들, 이들 사이에 생수를 들어 보이며 판매하는 잡화상들이 대략 2km가 넘는 대기 행렬 속에 뒤섞여 있었다.
베네수엘라는 전 세계에서 원유가 가장 많이 매장된 곳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들은 이처럼 기름을 구하지 못해 길게는 3~4일을 길에서 허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장 큰 이유는 생산량 감소로 꼽힌다.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량은 1997년 1일 300만 배럴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지속해서 감소, 2018년 10월에는 117만 배럴, 지난해 8월에는 71만 배럴까지 떨어졌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가 넘을 때 얻은 원유 수출 수익으로 생산시설 재투자, 유지보수 등을 해야 했지만 각종 포퓰리즘 정책 재원 마련, 정치인들의 착복으로 날려 버렸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2017년 미국의 경제 제재로 중질유 생산에 필요한 정제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원유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기자가 방문했던 지난해 12월에는 하루 생산량이 95만배럴로 회복했다는 점에서 생산량 감소만으로 국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에 대한 미국의 금지 조치로 수출이 막힌 상황에서 이 생산량으로 국내 수요는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정부가 재원 마련을 위해 석유 공급량을 조절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국내외에서 퇴진 압박을 받아온 마두로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원유 밀매로 마련하느라 국내에 푸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라카스에서 만난 한 무역업자는 “국내에 공급하는 기름 가격은 공짜나 마찬가지인데 국경을 넘으면 국제 유가를 받는다”며 “국민들이 기름 부족으로 불만이 고조될 때쯤이면 카라카스 등 대도시에 조금씩 풀어주면서 달랜다”고 말했다.
카라카스ㆍ마라카이=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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