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2인조 4시간여 만에 검거
도난 성금 6000만원 전액 회수

전북 전주에서 이맘때면 나타나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절도사건으로 얼룩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노송동에서 20년째 선행으로 유명한 익명의 후원자가 두고 간 성금다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4시간여만에 회수됐다. 매년 연말 주변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 ‘천사의 성금’에 누군가 손을 대자, 전북경찰청과 충남 지역 경찰이 즉시 공조에 나서는 풍경이 벌어졌다. 경찰은 일당 2명을 붙잡았다. 천사의 성금을 도둑질한 사건에 전주시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빠졌다.
30일 전주완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3분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센터에 “센터 인근 천사쉼터 나무 밑에 기부금을 놨으니 확인해보라”는 50대 중년 남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민센터 직원 3명이 나가 평소대로 나무 밑을 훑었으나 성금을 발견하지 못했다. 해당 장소는 주민센터에서 1분이내 거리다. 10시7분쯤 재차 전화가 걸려와 “성금을 찾았느냐”고 물었고 직원들은 다시 주변을 뒤졌지만 성금은 없었다. 이후 두 차례 더 전화가 걸려와 “물건을 아직 못 찾았느냐”며 상자 위치를 자세히 알려줬다. 직원들이 30분 넘게 주민센터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상자를 찾지 못했다.
난처해진 직원들은 “성금을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고 경찰에 다급하게 알렸다. 10시46분쯤 익명의 남성으로부터 다섯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직원들은 상자를 발견하지 못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전달했고 정작 이 남성은 “경찰 조사 시 제 차량 등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경찰은 즉시 목격자 진술과 주변 폐쇄회로(CC)TV를 분석했다. 이후 범행 현장에 머물렀다가 떠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추적해 4시간여 만에 대전 유성과 충남 계룡에서 30대 남성 용의자 2명을 붙잡았다. 전북경찰청은 이들이 충남지역으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충남경찰과 공조해 용의자를 조기에 검거했다.

범인들은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 범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6~27일과 이날 주민센터 주변에서 번호판을 가린 차량을 세워두고 잠복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교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유튜브를 보니 얼굴 없는 천사가 이 시기에 오는 것 같더라. 컴퓨터 매장을 한 곳 더 열기 위해 돈이 필요해 훔쳤다”고 진술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컴퓨터 가게를 운영하는 피의자가 유튜브를 보고 직업이 없는 공범 1명에게 범행을 제안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검거 현장에서 도난 당한 성금 상자를 회수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100장을 묶은 12개 다발 6,000만원과 돼지저금통, ‘소년소년가장 힘네세요’라고 적힌 A4 용지가 들어 있었다. 경찰은 기부금을 회수하고도 얼굴 없는 천사에게 되돌려주지 못했다. 천사의 지인을 참고인으로 불렀지만 고사하는 본인 뜻을 재확인했고, 결국 선행 취지가 퇴색하지 않도록 돈을 주민센터에 전달할 예정이다.
전주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수 천 만원에서 1억원씩을 몰래 놓고 갔다.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20차례에 걸쳐 총 6억834만660원을 기부하면서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은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시는 천사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2009년 노송동주민센터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성금은 전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노송동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여 왔다. 홀몸노인과 소년소녀가장, 조손 가정 등 소외 계층을 위해 써달라는 후원자의 뜻에 따른 것이다. 노송동의 초ㆍ중ㆍ고교에서 10여명의 ‘천사 장학생’을 선발,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도 지급해왔다.
전주시 관계자는 “기부금 도난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천사의 도시’ 이미지가 훼손되고 훈훈했던 연말 분위기가 우울해질 것을 크게 걱정했다”며 “우여곡절 끝에 돈을 되찾아 희망이 이어질 수 있어 다행이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주=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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