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제(北齊) 시대, 어떤 사대부가 시 짓는 것을 좋아했다. 수준 이하의 실력이지만 자아도취에 빠져서 최고의 시인들을 형편없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속으로 조롱하면서도 거짓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하자 그는 이 말을 진짜로 믿었다. 소를 잡고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대접하여 이름을 알리고자 하였다. 반면 보는 눈이 있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웃음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간곡히 눈물로 말렸다. 그러자 남편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의 뛰어난 재능을 아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나온다.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찌 시를 짓고 글을 쓰는 일뿐이겠는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실력과 수준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수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왕 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백(李白, 701-762)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국에 시인이 많다지만 첫 번째를 꼽는다면 당(唐)나라 이백이 아닐까 싶다. 이백은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어린 이백이 공부하기가 싫어서 서당을 빠져 나와 놀다가 우연히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시냇가에 쪼그려 앉아 쇠공이를 숫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동한 이백은 노파에게 무엇을 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바늘을 만들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굵은 쇠공이가 언제 바늘이 되냐고 묻자 노파가 말했다. “얘야, 쇠공이의 굵은 모습만 보지 말거라. 매일매일 갈면 나중에는 바늘이 된단다.” 이 말에 깊이 감동한 이백은 공부할 때 늘 그 노파를 염두에 두었고 큰 성취를 얻었다. 여기서 ‘마저성침(磨杵成針,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송나라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렇게 실력을 갈고 닦은 이백이 세상에 나오자 단숨에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이백은 호기롭게 외쳤다. “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셨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다(天生我材必有用)”. 이렇게 의기양양하던 이백에게 좌절을 안긴 사건이 있었다. 명승을 유람하고 다니던 중, 이백은 황학루(黃鶴樓)에 이른다. 삼국시대 오나라 때, 호북성 무창(武昌)의 장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지은 건물로 신선이 누런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기막힌 경치를 보고 시 한 수를 읊으려는데 머리 위에 최호(崔顥)가 쓴 ‘황학루’란 시가 걸려 있었다.
“옛 사람 누런 학 타고 가버리니 이곳에 황학루만 속절없이 남았네. 누런 학 한 번 가고 다시 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년 동안 부질없이 흐른다. 맑은 강물 건너편 나무 뚜렷이 보이고 모래섬에는 봄풀이 무성하다. 날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자욱한 강가에서 수심에 잠기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이백이 이 시를 읽고는 기가 막혀서 붓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백은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던지 몇 해 뒤 금릉(지금의 남경) 봉황대에 이르러 반격을 시도한다. 그때 지은 작품이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이다.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더니 봉황 가고 누대는 비었는데 강물만 스스로 흐르는구나. 오나라 궁궐 꽃과 풀은 외진 길에 묻혔고 진나라 귀족의 무덤은 언덕이 된 지 오래네. 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봉우리만 보이고 강물은 모래섬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뜬구름이 늘 해를 가려서 장안을 볼 수 없으니 근심만 깊어지네.(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
후세의 평가를 보면, 이백이 최호를 모방한 것으로 보거나 기세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황학루’가 낫다는 쪽이 많았다. 시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이백을 위해 한마디 하고 싶다. ‘황학루’는 앞에서 전설을 풀어내고 뒤에서는 개인의 소회를 쓸쓸히 풀어내고 있으므로 전편에 적막감이 감돈다. 이에 비하여, 이백은 ‘봉황대’에서 오나라의 영화(榮華)가 스러진 것과 동진(東晉) 고관대작의 호화롭던 분묘들이 언덕이 되어 버린 것을 탄식하다가, 구름 자욱한 장안을 바라보며 당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 소인배를 비유한 뜬구름에는 이백의 우환의식이 담겨 있다. ‘황학루’에 충격받고 지은 ‘봉황대’에 대한 평가는 후인들의 몫이지만,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다시 분발했던 이백의 투지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백의 삶은 고단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전진해 나갔다.
2019년의 마지막 날, 이백이 쓴 ‘행로난(行路難)’의 한 구절을 읽어본다. “가는 길 어렵구나, 인생길 힘들구나. 갈림길도 많구나. 지금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큰 바람 타고 파도 헤칠 날 있으리니(長風破浪會有時). 구름 돛 높이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直掛雲帆濟滄海).”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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