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ㆍ이념 대신 ‘세대 투표’ 새 변수]
선거법 개정에 만18세 新유권자 50만명… 20대 96% “투표 의향”
세대 투표 세계적 위력… 20대男 文정부에 싸늘, 젊은 표심 안갯속
‘청년층의 반란’을 뜻하는 ‘유스퀘이크’(youthquake). 젊음(youth)과 지진(earthquake)을 합한 말로, 정치 분야에선 청년 유권자가 정치 판을 흔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세대 투표’의 위력은 최근 영국 총선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년 4월 15일 실시되는 21대 총선에서 ‘한국 판 유스퀘이크’가 나타날까. 다시 말해, 오랜 기간 한국 정치를 장악한 ‘지역’과 ‘이념’ 대신 ‘세대’가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까.
지난 27일 국회를 통과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선거 연령을 ‘만 19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었다. 2002년 4월 16일 이전에 태어나 내년에 고 3이 되는 5만명을 포함해 약 50만명의 10대 유권자가 새로 등장하게 됐다. 유스퀘이크의 진폭이 커질 여건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선거 지형이 이미 ‘세대 투표’로 기울었다고 분석한다. 다른 변수보다 유권자의 나이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29일 “2010년 지방선거부터 세대 투표로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간 나이 변수가 두드러져 보이지 않은 것은 중ㆍ장ㆍ노년층의 투표율이 청년층보다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별 투표율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1981~1994년생)의 정치 참여 열망이 달아오르고 있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20대의 투표율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46.6%에 그쳤다가 10년 만인 2017년 19대 대선에선 76.1%까지 치솟았다. 2016년 겨울, 광장의 촛불이 나라를 통째로 바꾸는 것을 목격한 청년층의 경험, 즉 정치적 효능감이 투표 열기로 이어진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의 조사(20, 21일 실시ㆍ95%에 표본오차±3.1%포인트)에 따르면, 20대(19~29세)의 69.3%가 ‘내년 총선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가능하면 투표하겠다’는 응답도 26.2%였다. 실제 투표장에 가는 인원은 줄어들겠지만, 총선을 약 4개월 앞두고 투표 의향층이 90%를 넘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마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은 1.2%, ‘전혀 투표할 생각이 없다’는 3.2%에 불과했다.
이에 여의도는 닥쳐 올 유스퀘이크 대비에 분주하다. 더불어민주당은 29일 ‘고스펙 금수저’가 아닌, ‘평범한 이남자(20대 남성)’를 대표하는 원종건(26)씨를 총선 영입 인재 2호로 발표했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27일 전국 지역구 중 최대 30%에서 2040세대를 공천하겠다고 공언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청년 세대에겐 공천심사 비용과 경선 비용을 면제ㆍ삭감해 주기로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29일 “만 16세까지 선거 연령을 낮추는 캠페인을 벌이고, 21대 국회에서 피선거권을 20세 이하로 낮추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지구촌 선거에서 ‘유스퀘이크’는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지난 11월 홍콩 구의원 선거에선 범민주 진영이 중국에 대한 저항감이 큰 밀레니얼 세대의 지지에 힘입어 친중국파에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CNN을 비롯한 외신들은 ▦청년 유권자 수가 이전 선거보다 12.3% 증가한 점 ▦해외 유학 중에도 귀국해 투표할 정도로 청년 유권자들의 투표 열기가 뜨거웠던 점 등을 승리 요인으로 분석했다.
이달 실시된 영국 조기 총선 직후, 유럽 언론들은 “세대 투표가 총선 결과를 좌우했다”고 보도했다. 보수당이 승리한 것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ㆍ브렉시트)를 원하는 노년층을 집중 공략한 덕분이었다. 청년층의 표는 포기하는 대신,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년층을 대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바꿔 말하면, 계급ㆍ지역 투표는 저물고 세대 투표의 힘이 커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는 얘기다.
다만 한국의 유스퀘이크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다. 박성민 대표는 “20대 대부분이 부동층이 되는 경향이 있고, 특히 20대 남성이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라며 “이 같은 점이 내년 선거에 어떤 변수가 될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의 정치가 청년층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공정 구조에 분노할수록 세대 투표 경향은 더욱 또렷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 자세한 여론조사 개요나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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