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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2.0] “어르신들이 모아온 폐박스 재활용… 예술작품으로 재탄생”

입력
2019.12.30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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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가 20일 인천 부평의 사무실에서 폐박스를 재활용해 제작한 페이퍼캔버스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강은영기자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가 20일 인천 부평의 사무실에서 폐박스를 재활용해 제작한 페이퍼캔버스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강은영기자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고 결심했어요. 이분들을 위해 무언가를 꼭 해야겠다고요.”

지난 20일 인천 부평구의 ‘러블리페이퍼’ 사무실에서 만난 기우진(37) 대표는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리어카에 한가득 폐지를 실은 채 허리를 굽혀 힘들게 이동하는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기 대표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찍고 보니 어르신을 향해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거에요. 순간 깨달았습니다. 자그마한 햇살, 희망이 되어 드리고 싶다고요.”

러블리페이퍼라는 예쁜 문패처럼 폐지를 재활용해 사랑을 전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우선 어르신들이 거리에서 모으는 폐박스를 시세보다 6배 정도 비싸게 매입한다. 이 폐박스는 미술용 페이퍼캔버스로 재활용되고, 회화 작가들의 재능기부가 입혀져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완성품의 판매 수익금은 폐지수집 노인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기 대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어르신들을 고용하고 있다. 폐박스가 페이퍼캔버스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어르신들의 노동이 투입되고 있는 것. 현재 6명의 어르신들이 일하고 있다. 물론 이분들 역시 폐지를 수집하는 일에 손을 놓지 않고 있다. 생계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 대표는 빈곤한 노인들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풀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나라는 노인문제를 대개 개인화하고 있습니다. 빈곤과 연결해서 말이죠. 이를 개선하고 싶은 게 목표예요. 폐지 줍는 일에 대한 인식 개선과 생계 및 안전 문제, 일자리를 통한 소속감,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작은 것부터 해볼 생각입니다.”

기 대표는 2013년 ‘굿 페이퍼’라는 종이나눔운동본부를 만들어 폐지 줍는 어르신들과 첫 인연을 맺었다. 대안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그는 학기말이면 초, 중, 고교에서 많은 양의 책을 정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학교에 종이 기부를 통해 노인들을 돕는 일을 설명했다. 학교 측이 흔쾌히 응하면서 6톤 분량의 책을 기부 받았다. 책을 팔고 난 금액이 70만원. 폐지를 줍는 10여 명의 어르신에게 방한복을 해드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러블리페이퍼에 고용된 6명의 어르신들이 폐박스를 페이퍼캔버스로 재활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러블리페이퍼 제공
러블리페이퍼에 고용된 6명의 어르신들이 폐박스를 페이퍼캔버스로 재활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러블리페이퍼 제공

이후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10여 개의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책 등을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교회나 학원 등에서도 동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당시 고물상에서 종이 1㎏당 50~60원인 시세가 문제였다. 아무리 종이를 많이 모아도 돈으로 환산하면 형편없었다. 차라리 어르신들이 모은 폐지를 고가에 매입해 페이퍼캔버스를 만들자는 묘안을 짜냈다.

기 대표는 만화가 소공 작가의 인터넷 블로그를 보고 무릎을 쳤다. 폐박스를 활용해 캔버스를 제작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고, 그를 찾아가 조언도 구했다. 하지만 쉬운 건 없었다. 캔버스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는 캔버스를 예술작품으로 바꿔 부가가치를 높여 되파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재능기부를 받는다는 글을 올렸다. 4시간 만에 150여 명의 예술가들이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7년 러블리페이퍼가 탄생한 계기가 됐다. 현재는 캘리그래피(붓이나 펜을 이용해 종이나 천에 글씨를 쓰는 것) 및 회화 작가 300여 명이 재능을 기부해주고 있다.

러블리페이퍼는 홈페이지에서 이들 작가의 작품을 ‘정기 구독’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월 1만~3만원의 회비를 내면, 금액에 따라 1년에 작품 4~12개를 받아보는 방식이다. 기 대표는 “현재 구독자는 270여 명 정도”라며 “정기구독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월 평균 350만원, 연간 4,200만원 정도로 사업을 운영하기엔 사실 턱없이 부족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주 수입원은 기업이나 학교를 대상으로 한 강의다. 기 대표는 러블리페이퍼에 대해 강의를 하고, 참여자들이 직접 페이퍼캔버스를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페이퍼캔버스를 만드는 과정에 어르신을 한 분씩 보조강사로 기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노인들이 더 이상 수혜자가 아니라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는 호혜성을 전해주고 싶어서”다. 노인 고용에 대한 문제 해결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미도 포함된다.

최근 기 대표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페이퍼캔버스 아트의 정기구독자 중 한 분이 기 대표의 사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한 지역에 러블리페이퍼 지사를 만들어 어르신들이 오면 폐지를 매입하고, 그 지역의 자원봉사 인력을 연결해 페이퍼캔버스를 제작하자는 제안이었다. “내년에는 지방 거점화를 통해 더 많은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게 기 대표의 바람이다.

내년에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일명 ‘학교종이 땡땡땡’ 프로젝트로, 학교에 수거함을 두고 종이를 나누는 사업이다. 초, 중, 고등학교에 수거함을 설치라면 종이를 수거하는 일은 어르신이 하는 것이다. 15개 학교가 모아지면 일자리 하나가 생기도록 했다. 만약 500여 개 학교가 참여하면 30여 명의 노인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는 멋진 꿈이다.

“저는 ‘3관왕’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점ㆍ관심ㆍ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관점을 바꾸면 관심이 가는 이웃이 있고, 또 관심이 가는 이웃과 관계를 맺는 것이죠. 제가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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