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운용위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 의결
횡령ㆍ배임ㆍ사익편취 기업에 이사해임, 정관변경 요구 가능
당장 효성ㆍ대림산업 거론…재계 강력 유감 표명

국민연금이 횡령ㆍ배임 등으로 기업가치가 추락했음에도 개선 의지가 없는 투자기업에 이사해임, 정관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부터 이사해임 등을 제안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국민연금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는 27일 서울 더플라자 호텔에서 회의를 열어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 목적의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범위, 절차 등을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은 지난해 7월 국민연금이 도입한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의 후속조치로, 횡령ㆍ배임ㆍ부당지원ㆍ경영진 사익편취 등 기업가치를 훼손한 기업이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없을 경우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을 행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민연금이 이사해임, 정관변경 등 핵심 경영 행위에 직접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주주활동 대상 기업은 개선 판단기준, 주주제안의 실효성, 산업의 특성과 기업의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정하기로 했다.
의결된 가이드라인에는 그간 과도한 경영개입이라며 반대해온 재계의 의견을 반영해 주주제안을 철회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도 추가됐다. 기금위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주주제안 대상 기업이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산업계 전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산업계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으면 주주제안을 하지 않거나 철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주주활동 대상인 ‘중점관리사안’, ‘예상하지 못한 우려사안’ 항목도 변경됐다. 기업 총수 일가의 갑질 등 기존에 예상하지 못한 우려사안에 해당하던 ‘기금운용본부의 정기 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ESG) 평가에서 2등급 이상 하락해 C등급 이하를 받은 경우’는 ‘중점관리사안’으로 분류됐다. 이 역시 ‘기금운용본부의 ESG 등급을 사전에 알 수 없어 기업에 방어권이 없다’는 재계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2단계를 거치는 ‘예상하지 못한 우려사안’보다 4단계를 거치는 ‘중점관리사안’으로 기업들이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다.
다만 수탁자책임활동 기간(1년 단위)의 경우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나 기금위의 의결로 기간을 단축하거나 바로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 내용도 담았다. 기금위는 ESG 평가와 관련. 방식ㆍ내용 등을 확정하기 위한 준비기간을 거쳐 실제 평가는 2021년 이후부터 시행하기로 의결했다.
이날 기금위 의결을 토대로 내년 3월 기업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 국민연금이 광폭 행보를 할지 주목된다. 횡령ㆍ배임ㆍ사익편취 등으로 물의를 빚고, 기업가치를 떨어뜨려 주주권리를 침해한 기업이 당장 대상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예컨대 200억원대 횡령ㆍ배임 혐의로 올해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회삿돈으로 변호사 비용 400억원을 대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익편취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 등이 벌써부터 거론되고 있다.
경제인단체들은 강력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금위 의결 직후 “독립성이 취약한 현행 기금위 구조를 감안할 때 앞으로 정부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 민간기업의 정관변경, 이사 선ㆍ해임 등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가이드라인 내용도, 일방적 밀어붙이기식 강행 절차도 문제”라며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박 장관은 “가이드라인 목적은 기업 길들이기가 아닌 장기수익 및 주주가치 제고”라며 “주주활동이 자의적으로 결정되지 않도록 원칙과 기준, 절차를 투명하게 규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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