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꼬마 니콜라’라는 책을 좋아했다. 악동 니콜라가 친구들과 좌충우돌 유년기를 보내는 내용이다. 역시 유년기를 보내던 나는 니콜라의 장난스러운 행동과 해학적인 문체에 열광했다. 그 책에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니콜라의 장난에 맥이 빠진 대목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간호사에게 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다음 종이 위에 권총을 잔뜩 그려댔다.”
그 뒤 의사라면 종이 위의 권총을 연상했다. 가끔 인터넷에도 ‘의사가 쓰는 알파벳’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돌아다닌다. 그 사진의 A부터 Z는 모조리 마구 그린 동글뱅이인데, 전부 똑같이 생겼다. 의사가 되기 전 막연히 두려워했던 것 중에는 이 권총 글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런 꼬부랑 글씨를 어떻게 독해하고 또 어떻게 직접 써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능통하다. 일단 기본적인 팁을 공개한다. 놀랍게도 의사들이 쓰는 그 글씨는 영어다. 라틴어도 독일어도 아니다. 심지어 필기체도 아니고, 그다지 특수한 영어도 아니다. 의학 용어와 약자가 섞인 평이한 보통 영어다. 차트에는 환자가 내원한 경위, 호소 증상, 진찰 결과, 의심되는 진단명과 향후 계획이 간략하게 적힌다. 그뿐이다. 작성 흐름만 정해져 있고, 더 복잡한 법칙도 없다.
그렇다면 의사들의 차팅은 왜 그렇게 악명이 높을까. 사실 차트를 영어 연습장처럼 깔끔하게 쓰는 사람도 많다. 학생 때는 대부분 정갈하게 작성하다가, 점차 망가진다. 바쁘고 기술해야 할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글씨는 날아간다. 손이 마비되는 것은 물론이고 휘갈겨 쓰는 게 조금 더 편하며, 못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욕망도 약간 있다. 레지던트 시절 수기 차트를 하루에 150개 가량 써야 했다. 일이 많은데 작성이 밀리니까 다들 차트에 영어를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 차트는 사실 우리끼리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거의 알아보라고 쓴 글씨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되는 단어 풀이 좁아서, 첫 알파벳 정도만 간신히 유추하면 단어의 길이로 짐작해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단어와 상황까지 고려하면 정확도는 올라간다. 그럼에도 도저히 판독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한번은 환자가 응급실로 와서 수기로 쓴 전원 의뢰서를 내밀었는데, 표정이 마치 “이 글씨가 도저히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당신이 알아보나 보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의뢰서를 보았는데 지금까지 뇌리에 선명할 정도의 악필이었다. 동종 업계 사람이 쓴 글이었지만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저도 의사지만 모르겠네요. 그냥 진료를 처음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병원에 있는 의사끼리는 서로의 이전 차트를 보고 환자를 파악할 일이 많다. 악필로 유명한 동료의 차트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젓게 된다. 자기만 쓰는 약자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까지 엉망이다. 나 또한 악필이라 동료들을 많이 절망하게 했다. 대신 내 글씨를 알아보는 수제자가 몇 명 있었다. 각자 ‘초급 남궁인어 수료자’나 ‘중급 남궁인어 수료자’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고급 남궁인어’는 나만 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독립 언어의 시대였다.
그러나 권총 글씨는 이제 과거가 된 지 오래다. 근 몇 년 동안 대부분의 병원이 전자 차트로 변했다. 응급실로 찾아오는 소견서도 거의 다 인쇄된 문서다. 사실 수기 작성의 번거로움, 방대한 의무 기록의 보관, 수기의 부정확성, 종이 사용에 대한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 그전까지 어떻게 수기 차트를 사용해 왔는지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 차트 위의 권총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 왔다. ‘초급 남궁인어 독해’나 ‘중급 남궁인어 독해’는 추억 속의 아련한 일이 되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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