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이 훗날의 선거제 개편안을 예상한 듯 “비례, 비례”하고 노래했던 80년대, 탕약 세계에도 혁신이 일어났다. 보온 기능을 갖춘 저렴한 전기 약탕기와 파우치 포장 기술이 크게 보급됐다. 탕약방은 각종 즙들을 병 대신 파우치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수 양준일 씨가 돌아왔다. 그의 귀환은 우리 사회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과거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게 싫다”는 말과 함께 비자 연장을 거부당했다던 그다. 이번 입국 때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한 대학원생은 그런 양준일 씨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1994년에 태어난 학생이니 그럴 만하다. 그해 서울대공원은 ‘미국 여권 소지자,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 쓰는 사람’의 입장을 사양한다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우리는 어떤 과거를 곧잘 잊고 지낸다. 90년대 초반 어느 날, 친구네 집에 하숙하던 대학생 형이 ‘상습 해외여행’ 혐의로 붙들려간 일이 있다. 목적 없는 해외여행을 두 번 했다는 이유였다. 해외여행이 허용된 1989년 이후에도 한동안, 해외에 나가려는 이는 출국 전에 사상교육, 안보교육을 받아야 했다. 가끔씩 외화 낭비를 질타하는 여론이 일면 경찰은 시범 케이스로 몇 사람씩 불러들였다. 이른바 국민 여론이 양준일씨 같은 동포 가수의 국내 활동은 물론 가난한 대학생의 배낭여행도 못마땅히 여길 때였다.

그래도 90년대는 80년대에 비해, 80년대는 70년대에 비해 나았다. 건강 음료 또한 그러했다. 과거에는 한의원에서 써준 처방전대로 약을 달여주는 탕약방이 동네마다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약 외에도 뱀, 개구리, 자라 등을 즙 내어 페트병이나 도자기병에 넣어 팔았다. 뱀탕의 이름은 ‘역전 앞’이나 ‘족발’이라는 말들처럼 항상 ‘뱀사탕’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별세하신 뱀님들이 실제로 약탕기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런 하드코어 보약들이 국민 건강에 이바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탕약사들은 근면하고도 성실하게 생산수단을 돌렸다. 아마도 그래서 경제도 발전했다.

경제 발전은 혁신을 낳는다. 마이클 잭슨이 훗날의 선거제 개편안을 예상한 듯 “비례, 비례”하고 노래했던 80년대, 탕약 세계에도 혁신이 일어났다. 보온 기능을 갖춘 저렴한 전기 약탕기와 파우치 포장 기술이 크게 보급됐다. 탕약방은 각종 즙들을 병 대신 파우치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 영롱한 눈빛의 사슴과 뒤틀린 자세의 인삼을 그려 넣은 투명 파우치에 흑염소, 붕어, 장어 등 예전보다는 친근한 동물들이 들어갔다. 탕약사들이 더욱 근면성실하게 생산수단을 돌린 덕분에 경제는 더욱 더 발전했다.

파우치 속의 내용물은 시대의 변천을 따랐다. 90년대는 칡, 도라지, 마늘, 양파가 탕약 세계의 제1여당을 차지했고 2000년대에는 사과, 포도, 배, 양배추가 그 자리를 꿰찼다. 요즘은 석류, 아로니아, 블루베리가 구세력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제 와 성분표시를 보니 내용물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마시는 과일주스에 근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건강 음료는 계속 파우치에 담긴다. 어쩐지 몸에 좋은 것 같고 고맙기 때문이다.

파우치에 담긴 쓰디쓴 갈색 액체는 곧 가족의 사랑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친척 어르신이 보내온 사랑을 이 땅의 어린이들은 울면서 빨았다. 우리가 보약이라고 불렀던 그 아름다운 이름은 또한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장인이 사위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파우치에 담아 보낸 마음을 이 땅의 어른들은 찡그린 얼굴로 마셨다. 그러면 진짜 몸이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고마웠다. 그리하여 마실 것을 파우치에 담는 우리 특유의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정(情)의 물신으로 남았다.

파우치 형태는 마실 때 불편하고 환경 쓰레기도 많이 나온다. 내용물이 바뀐 만큼 그것을 담는 형태도 알맞게 개선하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 나은 포장법을 별로 살피지 않는 까닭은 수십 년 전부터 몸에 밴 인식, 파우치에 담아 박스에 넣어야 건강할 것 같은 물신 때문이다. 시대가 바뀐 후에도 옛 정치 시스템을 놓기 어려운 것처럼.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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