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흥행 눈치 볼 것 없다… 영상미에 몰두한 이단아 이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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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흥행 눈치 볼 것 없다… 영상미에 몰두한 이단아 이명세

입력
2019.12.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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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충무로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이명세(오른쪽부터) 감독이 2005년 5월 27일 경기 남양주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영화 '형사Duelist'의 출연배우 하지원, 강동원, 안성기와 함께 모니터로 촬영 장면을 확인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명세(62)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이단아였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주인공 이종세(안성기)가 “지금 찍는 영화 테마가 뭡니까? 이런 테마가 너무 낡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라고 기성 감독에게 질문을 던지는 ‘개그맨’(1988)의 한 장면은 당대 한국영화계의 흐름에 날리는 한 신인감독의 일침이었다. 정치적으로 억압되어있던 시기, 박광수, 장선우, 정지영 감독 등이 현대 한국의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며 영화를 사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았다면, 반대로 이 감독은 영화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 영상미학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 몽상가 소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사랑의 순간을 맞아, 불가사의한 감정의 설렘과 사그라듦을 경험했고, 꿈과 사랑, 그리고 영화에 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영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개의 질문은 영화감독 이명세의 평생을 장악한 화두였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지. 나는 그때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하는가. 그때 문득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말겠다는 영감을 얻었어. 임창의 ‘땡이와 영화감독’이라는 그 만화 속에서 영화감독은 정말 근사해 보였거든.”(영화 ‘개그맨’에서 이종세의 대사)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9)은 만화 같은 상상력으로 당시 충무로와 사회를 풍자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명세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첫 흥행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군대에서도 오직 영화 생각 

서울예전(서울예대 전신) 영화과에 진학한 이 감독은 김수용 감독의 ‘달려라 만석아’ ‘빨주노초파남보’(1979)로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경험하고 군에 입대했다. 이 감독의 영화에 대한 사랑과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진지함은 군대에서도 여전했다. 군장하고 뛸 때마다 하라는 구호 대신 “스필버그, 스필버그”를 외쳤고, 병영생활의 불합리함을 납득하지 못해 고초를 겪다 13군데의 부대를 전전하고 나서야 전역할 수 있었다.

영화인 이명세의 본격적인 활동은 과거 연출부 생활을 함께했던 배창호 감독의 ‘철인들’(1982)에 조감독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그는 길거리 장면을 찍을 땐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 50명 정도는 즉석에서 충원하는 등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고래사냥’(1984)이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전성기 배창호 영화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한 유능한 조감독이었다. 배 감독은 ‘황진이’(1986) 때는 배우들의 연기지도를, ‘기쁜 우리 젊은 날’ 때는 예고편의 연출을 일임할 만큼 조감독 이명세를 신뢰했고, 데뷔작 ‘개그맨’의 주연 문도석 역으로 기꺼이 출연해주었다.

“‘가족’이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평가가 좋았음에도 결국 촬영에 들어갈 수 없었지. 내 운명은 조감독인가보다 싶어서 그냥 포기할까도 생각했어.(중략) 그런데 이전에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찾아가서 다른 시나리오를 내미는 걸 보고 태흥영화사에서 깡이 좋다고 데뷔시켜 준거야. 일주일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지”(이동진 저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데뷔작 ‘개그맨’은 해를 넘겨서야 개봉했고 서울관객 4만명으로 손익분기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에 그쳤다.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은 ‘마누라 죽이기’라는 제목으로 남편이 아내가 마실 커피에 쥐약을 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다소의 서스펜스가 가미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구상 도중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하는 고민에 빠진 이 감독은 초기 아이디어와는 전혀 다른,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로맨틱 코미디로 방향을 틀었다. 최진실, 박중훈 주연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는 그렇게 탄생했다.

극적인 사건 없이 일상 속 미세한 감정의 결을 잡아내며, 때론 오해하고 질투하는 20대 신혼부부의 풋풋한 모습을 파스텔 톤의 동화로 그려낸 영화는 1990년 12월 29일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해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했고, 영화를 빨리 내리고 홍콩영화를 걸고자 한 극장주에게 이 감독이 박치기를 날린 일화를 남겼지만 서울관객 17만명의 성공을 거둔다. 화면에 말풍선을 넣는 독특한 연출,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 빗방울 떨어지는 처마, 보글보글 끓는 포트의 물 등 사소한 소품이나 배경까지도 영화의 감정과 융합시키는 등 이명세 특유의 영상미는 이 두 번째 영화에서 완숙한 경지를 이루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제29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제3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최고신인상을 휩쓸며 한국영화에 새로운 감성과 스타일이 등장하고 있음을 널리 알렸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남자는 괴로워'(1995).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진 못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인정 사정 볼 것 없다'의 빗속 혈투 장면. 국내외에서 숱하게 패러디된 명장면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흥행 참패 견뎌낸 스타일리스트 

전성기를 맞는가 했던 이 감독의 경력은 한동안 불운했다. 김혜수, 송영창 주연의 ‘첫 사랑’은 관객수가 1만명도 채 들지 않는 흥행 상의 재난을 맞았다. 이 작품에서 이 감독은 열두 번이나 세트를 고쳐 짓는 집요함을 보이며 사랑에 빠진 여대생의 시점으로 보이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지만, 현실로부터 튕겨 나온 만화적 미장센의 과잉된 양식미를 관객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겪는 삶의 비애를 낭만적인 터치로 그린 ‘남자는 괴로워’(1995), 이왕이면 부산에서 영화를 찍어달라는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요청으로 다대포에 세트로 지어서 촬영했던 ‘지독한 사랑’(1996)도 흥행에서 고배를 마셨다. 사람들은 그를 고집스러운 형식주의자라고 수군덕거렸다. 이 감독은 한국영화의 관습으로 굳어져있던 리얼리즘에의 강박, 서사중심의 영화관(觀)과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세 편을 연달아 실패한 그에게 다시 연출의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한 이는 없다시피 했다.

“난 이상하게도 흥행 쪽으로는 늘 마음이 편했어. ‘첫 사랑’이 개봉하던 날 명보극장 앞에 갔는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거야. ‘하나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라고 받아들이고 바로 집에 들어가서 ‘지독한 사랑’ 시나리오를 썼지. 하나님이 내 본성의 천박함을 아시고 들뜨지 않게, 잘난 척 하지 않게 누르셨구나 하고. ‘남자는 괴로워’가 개봉했을 때도 영화가 또 망했어.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지독한 사랑’도 그랬지. ‘하나님이 나를 아주 지독하게 사랑하시는구나.’” (김영진 저 ‘평론가 매혈기’)

‘지독한 사랑’을 마친 후 이 감독의 관심은 형사 영화로 옮겨갔다. 3부작을 기획하고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조사에 착수한 그는 인천경찰서의 협조를 구해 강력반 형사들을 따라다니며 1년간 숙식을 함께 했다. 범죄자를 잡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형사들의 모습에서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몰입하는 장인정신을 보았던 이 감독은 3부작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시놉시스를 발전시켜 각본을 써 내려갔다.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사장은 “이게 ‘경찰청 사람들’(당시 방송 프로그램)과 뭔 차이가 있느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구체적인 안을 짜두었던 이 감독은 어떤 장면이 만들어질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즉석에서 쏟아내며 설득했고, 제작 허가가 떨어졌다. 그룹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Holiday)’가 흐르는 오프닝이나 클라이맥스의 결투 장면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1999년 7월 31일 개봉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는 첫 날부터 대거 관객을 끌어들였고, 서울관객 66만의 대흥행을 기록하며 이 감독의 영화경력을 침체의 늪에서 구원해냈다.

그 뒤 이 감독의 발길은 할리우드를 향했다. ‘폰 부스’(2002)와 ‘네버랜드를 찾아서’(2004)의 연출을 제안받았고,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공포영화’를 비롯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하지만 최종편집권을 감독이 가질 수 없다는 조항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 감독은 결국 4년의 미국 체류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체류 생활 막바지에 미니멀리즘 미술 작품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은 형식미학의 정점을 이룩한 ‘형사 Duelist’(2005)의 근간이 되었고, 체류 기간 도중 썼던 공포 각본 ‘미리엄’의 일부 구상을 발전시켜 ‘M’(2007)을 찍었다. 대중적으로는 외면받았지만 한국영화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야심이 피워낸 영상미학의 화려한 불꽃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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