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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미국야구 독립리그인 애틀랜틱리그 올스타전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왔다. 겉으론 평범한 야구 경기와 다를 게 없었는데 심판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귀에 찬 블루투스 이어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다소 늦게 했다. ‘로봇 심판’이 데뷔한 날이다. 포수 뒤에 사람 형체의 진짜 로봇이 서 있는 건 아니었다. 투수의 투구를 레이더 방식으로 추적하는 ‘트랙맨 시스템’을 통해 전달받은 심판이 콜만 대신하는 방식이다. 3차원 공간에서 투구 궤적을 추적하는 트랙맨은 스트라이크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장치. 트랙맨에 장착된 인공지능(AI)이 타자의 키와 자세를 계산해 스트라이크존을 스스로 조정한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경기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미국 야구가 실험 중인 로봇 심판이 멀지 않아 메이저리그까지 확대된다고 한다. 야구 전통주의자들은 측정 기술의 정확도가 아직 담보되지 않는다는 점, 기계적 스트라이크 존은 야구 규칙이 정한 스트라이크 존 개념과 맞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반발하고 있다. 극단적인 예로 원바운드 공도 인공지능이 설정한 존만 통과하면 스트라이크가 된다. 데이브 로버츠 LA 다저스 감독은 “비록 오심이 나온다고 해도 그러한 인간적인 요소야말로 야구를 설명하는 중요한 일면”이라고 반대 목소리를 냈고, 투수 클레이튼 커쇼는 “로봇 심판은 미친 짓”이라고까지 비판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야구팬들처럼 로봇 심판의 등장을 지지한다. 단순 실수보다는 특정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관대한 판정, 볼카운트 스리볼-노스트라이크에서 투수에게 유리하거나 노볼-투스트라이크에서 타자에게 유리한 판정이 나오는 이른바 ‘심리적 편향성’이 사라질 것에 대한 기대가 크다.
로봇 심판이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까지 측정 가능한가라는 의문은 든다. 포수에게 중요시됐던 프레이밍(볼이지만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미트질을 하는 것)도 불필요한 능력이 될 터다. 야구에 앞서 국제체조연맹도 올해 체조월드컵에서 AI 심판을 시범 도입하기로 했는데 기계체조는 기술 난이도뿐 아니라 연기 내용의 창의성도 평가 대상이다. 과연 AI가 선수들이 풀어내는 동작의 아름다움까지 점수를 매길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다.
찬반은 나뉠 테지만 스포츠계 종사자들도 대체적으로 로봇 도입에 순응하는 듯하다.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심판들마저 전향적으로 수용 입장을 취해가고 있다. 독립리그에서 로봇 심판의 ‘대리인’으로 데뷔한 데브로웨어 주심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왜 스크라이크 콜이 이뤄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공의 윗부분이 존 맨 아래쪽을 스친 것으로 보인다”며 일부 문제가 됐던 로봇의 판정을 옹호했다. AI가 인간을 배척하거나,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존재란 발상의 전환 덕분에 가능한 심판들의 협조다. 판정 하나에 따라 팬과 선수들의 ‘공공의 적’으로 내몰렸던 그들은 이제 짐을 내려 놓았다는 후련함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바둑계는 이미 ‘알파고’, ‘한돌’을 통해 ‘인공지능 쇼크’를 경험했다. AI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기계에 패배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덕분에 진지한 성찰과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로 나선 바둑 AI와 달리 ‘심판 AI’에 대한 거부감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여러 구기 종목에서 의존도를 높여가는 비디오판독 시스템도 불과 몇 년 전까지 갑론을박이 계속된 제도였다. 스포츠는 ‘인간미’가 기계에 의해 침해당할 수 없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몇 차례 희대의 오심을 계기로 그라운드에 펼쳐 놓은 이 제도는 좀더 공정한 경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로봇 심판‘도 마찬가지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란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성환희 스포츠부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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